지난 금요일(20일) 탈레반 무장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지원 등 봉사활동을 하던 분당샘물교회 성도 20여 명을 납치해 지금 자신들의 동료 석방과 우리 군(軍) 동의 다산부대의 철수 등을 조건을 내걸며 살해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여론을 보면 이들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 곳에 갔느냐왜 그렇게 유별나냐, 기독교는 왜 그리 튀냐 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사랑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젊음을 주님께 헌신한 그들을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기도할 것뿐입니다. 이들이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도록, 탈레반과 이슬람의 영혼을 위해서, 선교의 문이 아주 막히지 않도록 말입니다.
요즘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복 받을 사람에 대한 성경 구절을 정리 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복 받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정말 우리들이 복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매우 원하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도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복을 받기 원하는데도 복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러면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비록 억류되어 고난 가운데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복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진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진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으면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을 성경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아도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하시어 저들을 성숙한 백성, 세계 속에 뛰어난 백성,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모세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막을 만들 것을 말씀하셨는데 저들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실어하시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저들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간신히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저들 속에 있는 죄악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진 문에 서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를 변호해주고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소원을 이루게 해 주고 힘과 용기를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갈 때마다 동족을 잃는 쓰라린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북군은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다 유리했지만 남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습니다.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서 다가와 말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일에 결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결정과 결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탄, 진실과 거짓, 거룩함과 죄악,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세상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이십니까?
여호수아는 임종의 순간에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결단하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의 편에 있어라. 나에게 속한 자가 되어라. 만일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라고 결정하신다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4~7)
또 히브리서 말씀에 보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13:5,6)
여러분이 하나님 편에 서려고 결단만 하시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절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고, 나의 대장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118:6~7) 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적장 골리앗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해서는 우상 숭배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속한 너는 그 장막에서 나오라" 하십니다.
저 반역의 무리와 하나가 되지 아니하려거든 내게로 나오라!
이 광란의 무리의 시끄러운 소리와 추태로부터 멀리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와서 여호와의 기 앞에 서야 합니다.
세상은 항상 눈치를 살핍니다. 대세가 어디로 기우느냐 사람들이 어디로 몰리느냐 그런 것을 살핍니다. 그걸 여론의 향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론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 누구에 의해 조작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 편으로 나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말씀 듣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신분을 숨겼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좋을 때는 자신이 예수님의 수제자임을 당당히 밝히다가 자신이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신분을 숨겼던 것입니다.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당신도 예수라는 사람과 한패지요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겁먹은 쥐처럼 움츠려 들었습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예수님 제자 같았지만 그의 중심, 그의 충심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에는 교회 교인 같습니다. 집사 직분도 받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면 아무 집사님, 아무 장로님 하고 부르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직장에 나가면,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뒤에서 얼마나 담대해집니까? 그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잡혀가서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 편에 서라는 것입니까?
27절을 보면 모여든 레위인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각 사람이 형제, 친구, 이웃을 죽이라니 참으로 엄청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을, 그의 친구들과 이웃을 죽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요, 또한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행하라 명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철저히 깨닫게 하고, 백성 속에 있는 죄의 씨앗을 완전히 걷어내어 거룩한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죄의 근원을 캐내어 버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적으로 내 속에 있던 잘못된 죄의 습관을 뿌리까지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때론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를 도려낼 때 거기에 은총과 소망의 싹이 피어나 새 삶을 살게 됩니다.
1907년 평양 부흥대성회를 이야기 하고 그러한 일이 오늘에도 임하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1907년의 핵심은 회개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도려낸 것입니다. 돈을 떼어 먹은 것, 병든 아내를 빨리 죽으라고 저주한 것, 너무 힘들어 자기 아이를 죽인 것, 첩을 두고 방탕한 것. 우상숭배한 것, 다른 이를 미워한 것 등등 온갖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럴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한국교회의 대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고 교회는 민족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바로 레위 자손들이 일어나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3천 명 가량을 죽인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적극적으로 죄에 가담한 주모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말합니다.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으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축복을 보면 레위 사람들은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창49:6)라고 저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들의 조상 레위는 범죄하여 복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 저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사명을 주었을 때 그것을 주저 없이 행한 것입니다. 사실 한 행동을 보면 레위나 그 후손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동일하게 살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는 자기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자기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자기감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어려운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을 칼로 죽이면서 눈물을 흘렸을지 모릅니다.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인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마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아론이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지파인 레위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들은 죄에서 돌아서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실을 눈물로 회개하면서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 후 레위인들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저들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레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신명기 33장 8~11절을 보면 모세를 통해서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오늘 헌신되었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채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원문으로 보면 “너희는 오늘 야훼를 위하여 너희 손을 가득 채워라. 각각 그 아들과 그 형제를 …….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말이 됩니다. 형제, 친구, 이웃을 손에 가득 채워 제물로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그 손에 무엇을 채워 드렸습니까? 바로 자기의 독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번제로 바쳤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삭을 바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자식까지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복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편이 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편이 된 이후부터는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랑거리로 삼던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을 위하여 쓰기로 결정하고 나아갔습니다. 마지못해 한 일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가장 위대한 헌신을 한 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다른 짐승이나, 다른 사람의 피를 제물로 드리지 않고 바로 자신을 제물로 바친 분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사람들의 구원과 용서와 복을 위해서입니다. 그 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9:11~12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과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10:1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세상 헛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주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금송아지 앞에 헌신합니다. 거기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낭비하고 허비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정말 가치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송아지 앞에서가 아니라, 즉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 헌신합니다.
존 낙스는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100명을 내게 주소서.”그런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했고 청교도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드릴 헌신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여호와 편에 있는 사람은 다 나와서 내 옆에 서라"
죄와 방종의 자리에서, 안일무사의 자리에서, 게으름과 나태의 자리에서 나와 주님 앞에 서십시오. 그 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힘을 주시고 진정한 복을 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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