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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평화, 예수님 박승남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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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2:13-18절 개역개정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13-18 우리의 평화, 예수님

 

북한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어떠한 본문으로 말씀을 전할지 고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여러 곳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선 창세기 33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감격적인 형제 상봉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생각했고 그래서 형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400명을 거느리고 맞으러 오고 있다니 덜컥 겁이나 얍복강가에서 홀로 남아 기도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 뒤 그는 비록 절으면서 걷게 되었지만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울면서 해피 엔딩이 이뤄진 것을 보면서 적대적인 우리 나라도 변하여 형제 사랑으로 만나고 화해하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시133편의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라는 말씀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아직까지 존재하는 남북의 이산 가족이 많이 있는데 보고 싶어하는 형제, 가족이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도 슬프고 이제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하루 속히 전 세계에 보란 듯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에스겔 37장의 내가 에브라임의 손 안에 있는 요셉과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지파의 막대기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유다의 막대기를 연결시켜서, 그 둘을 한 막대기로 만들겠다.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는 말씀이 우리 나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에브라힘과 유다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미워하고 싸우기도 했고 결국 두 나라가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나라들을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은 분단된 우리 나라에 희망을 주시는 벅찬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9절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예루살렘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하나되게 하시는 말씀, 평화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고 분열하고 전쟁으로 서로 죽이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닙니다.

1950625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37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10개월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 동안 아군은 77만여 명의 사상, 실종자를 냈고, 공산 측은 115만여 명의 사상, 실종자를 내었습니다. 국토는 초토화했고, 60여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으며 공업시설은 45%가 가동 불능 상태가 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는데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의 세기였다고 역사가들은 말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발행한 평화 속에 전쟁이란 보고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후만 해도 100여 개 국가에서 130건의 군사 분규가 있었고, 3500만 명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전쟁의 세월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인류의 전쟁 역사는 피의 목욕탕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인류의 역사는 투쟁과 전쟁의 역사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BC 1496년부터 AD 1861년까지 3357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고작 227년뿐이고 전쟁은 3130년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예일대학에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이라고 하는 교수님이 쓴 '전쟁의 기원(On the Origin of War)'이라고 하는 책에서 전쟁의 동기, 전쟁이 왜 있었냐?”하는 것을 총괄적으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이라 합니다. 상대가 두려우므로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넉넉하면 힘의 여유가 있으면 요사이 말로 초강 대적 여유가 있으면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힘이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익을 추구하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생기는 전쟁, 이것은 실리적 전쟁 동기론이라고 말합니다.

셋째는 명예를 추구하는 명분적 전쟁 동기론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사람이 최고라는 의식을 가집니다. 영국 사람들은 앵글로 색슨이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명예와 영광의식이 전쟁 동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전쟁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결코 도덕적인 목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것은 자국민들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용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수단과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류사를 보면 평화를 위한 노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하려고 한 전쟁이 있었지만 많은 피를 흘렸을 뿐 평화는 없었고 전쟁은 반복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중동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이렇게 싸움하는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내면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평안을 끼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유명한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자식과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적인 남자이자 흑인민권 운동 지도자였으며, 흑인 인권 옹호를 위한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였던 민중의 지도자였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교회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폭력을 써서는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백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차별을 해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줍시다라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을 군중에게 호소함으로써 흑인 민권운동을 벌임으로 평화로 승리하여 196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평화운동은 폭력을 극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전 수상 라빈1993년 유대인과 원수처럼 지냈던 아라파트 PLO 의장과 최초로 화해의 악수한 인물입니다. 그때 그가 많은 유대인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테러리스트와 손잡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안팎에서 들었지만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형제라며 그들의 인권과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9951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운집한 텔아비브 광장에서 평화에 관한 연설을 하던 중 동족이 쏜 총에 맞아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고 옷을 벗겼을 때 뜻밖에 그를 쏜 총알이 그의 안주머니에 있던 시집 평화의 노래에 명중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했던 유대인의 눈물이 담긴 빛바랜 시집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핏자국이 선명한 평화의 노래는 마치 영혼의 절규처럼 다음의 말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 마음 달래며, 진정 유다 사람 가슴에 고동치고 있네. 그토록 긴 세월 조국 그리움 달래며, 시온 동산에서 우리 만나보자고. 그토록 긴 세월 우리 희망 사라지지 않아 예루살렘 시온 동산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고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니 그는 조국을 찾기 위해 수년을 기다렸고 조국을 되찾은 후에는 팔레스타인이 그 땅에 있으므로 서로 죽이고 싸우는 전쟁보다 공존하는 길이 함께 사는 길임을 알고 서로의 평화를 위해 외치다가 평화를 위한 희생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지역 안데스 산맥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습니다. 양국 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마음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상에 다음 같은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시느니라.” 에베소서 214절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롭지 못한 모든 갈등 상황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는 수직적인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가까워졌습니다. 이는 서로 원수 시 하던 사람들이 한 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214절 뒷 부분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런데 여기에서의 은 그냥 담이 아니라 성전 안의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의 뜰로 넘어가는데 세워진 을 말합니다. 성전 뜰에 유대인과 이방을 위한 칸막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판에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문구는 이러합니다. 어떤 이방인도 들어올 수 없다. 둘러싼 안으로 성전 담장과 성전 영역, 잡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초래할 죽음에. 참으로 섬뜻한 문구입니다. 안뜰과 바깥들의 경계는 돌로 쌓은 낮은 담장이었습니다. 바깥뜰에 있는 외국인이 마음먹고 뛰어 넘어 들어간다거나 마치 유대인인척 열린 입구 어딘가를 통해서 들어간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발각이 되면 그 때는 거룩한 영역에 부정한 이방인이 들어간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죽음이었거든요.

심지어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존재 그 자체가 재앙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이방인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 어떤 고통을 받아도 도움을 주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반대로 당시의 그리스-로마인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야만족이라고 생각해서 유대인들은 인류의 역사나 문화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는 반유대주의가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담을 예수님께서 허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담을 헐어버리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210절 후반절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5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더욱 확장되어 다른 사람도 심지어 우리의 원수라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든지, 원수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그 은혜로 알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난 223일 독일 연방의회 총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보여드리는 표와 같이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당이 제 2당이 되어 가장 큰 야당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은 독일의 극우 정당입니다. 이들은 앙겔라 메르켈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면서 반외국인, 특히 최근 난민문제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취합니다. 한 마디로 다른 나라 신경쓸 것 없고 자기들 이익이 중요하다는 자국중심주의입니다. 그런데 통상 1당과 2당이 연정을 해서 정부를 꾸리는데 1당인 기독민주당과 기독사회당 연합은 이들과 연정하지 않고 3당인 사회민주당과 함께 해서 총리를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게 된 배경에 독일 교회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정신은 그래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난민들이 들어와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딸이었던 전 메르켈 총리 시절 독일 정부는 그러한 정책을 활발하게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요? 이렇게 포용적인가요, 평화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가요? 독일에서 목회하는 어떤 분은 한국교회는 독일교회와는 반대라고 하면서 한국교회는 함께 살아가는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통일을 선물로 주신다면 어떻게 북한 동포를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재 남북 관계는 장기간의 단절과 계속되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통일하지 말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줄고, 북한에 대한 인식은 더욱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되어야 합니다. 북한은 자원이 많아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이익이지만 우리 민족이 살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 되게 하셨느니라.”

본문을 보면 화평, 평안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옵니다. 그런데 다같은 단어로 평화(에이레네(샬롬))입니다. 그리고 16절의 화목화해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고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의 선한사마리아의 비유를 보면 사마리아인은 원수같은 사이인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진 것을 보고 도움을 손길을 폅니다. 왜요?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면 원수라도 사랑하고 돕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시면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릅니다. 테러는 전쟁을 부르고, 전쟁은 더 큰 비극을 초래합니다. 원수 사랑만이 평화를 이루어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이요 생명입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세계, 거기에는 전쟁과 죽음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샬 이라는 사람이 마샬플랜을 내놓았습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을 지원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 의하여, 전범국이고 적대국이었던 독일에 대해서도 어마어마한 경제지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원수 나라에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미국 내에서 얼마나 극심한 반대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샬플랜으로 인하여,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났고 유럽의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과는 달리, 독일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마셜은 1953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평화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잘 사는 세계를 이루어 갑니다. 인간의 문제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 역시 인간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주로 오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탈북동포가 북한에서 국경을 넘을 때 십자가 있는 곳을 찾으면 살 수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들의 희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면 밥과 의복을 주고 돌아갈 여비를 제공해 줍니다. 탈북한 모습 그대로 다니면 다시 북한 특무대에게 혹은 중국 공안에 잡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목욕시키고 이발을 시키는 일을 기독교인들이 은밀하게 행하게 됩니다. 좋은 시설의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목욕을 마치고 이발을 하고 식사를 제공해 주면 생전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는 일에 감격하면서 이제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친절과 사랑을 받고 여비를 받아 북한 땅 자기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때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종교는 아편이고, 기독교는 미제의 앞잡이로 북한을 황폐하게 만든 원수라고 배웠던 잘못된 인식이 깨끗이 사라지고 예수님, 교회, 복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열린 마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들은 훗날 통일이 되면 다른 누구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해방 전 북한 땅에는 있던 3,000이상의 교회당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그 많던 교회당이 다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에 복음이 들어가고 다시 믿음의 불길이 일어나고 이 교회들이 다시 복구되어지도록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자신들을 한 번 돌아보고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증오와 편견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와 그 사랑을 받아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2:17-18)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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