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두 손에 두 돌 판을 들고 힘을 내어 시내산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이 없이 올라가는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어 모세와 함께 서셨습니다. 이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지만 아무튼 하나님은 모세와 매우 가까이 해 주신 것이며 모세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지금 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고 또한 헛된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을 앙모하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다음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옵고 먹고 마셨습니다. 언약체결을 기념하는 식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온다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이 그만 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졌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되었습니다. 관계가 깨어진 부부사이처럼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금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롭게 언약을 맺고자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저들이 범죄함으로 그 언약의 무효처럼 되었지만 저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이제 새롭게 언약을 맺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연약을 맺으리니 너희는 나 아닌 다른 것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을 좆아낼 것이니 너는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그리고“내가 이 땅 모든 나라 사람들 가운데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았으니 너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만들지도 말라”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을 쫒아내시어 가나안 땅에 가서 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소유와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왜 언약을 맺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구별된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의 백성들과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된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주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 빛은 어두움과 구별됩니다. 소금은 부패와 구별됩니다. 우리 성도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야, 그리스도인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보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과 동화될 수도 없고 동화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쫓아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쫓겨날 저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은 저들을 다시금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악한 생각, 악한 문화, 우상숭배 문화를 네 마음에, 네 삶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껏 쫒아 내셨는데 그것을 다시금 끌어들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불신과 죄악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생명으로 하나님을 위해, 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죄를 좋아하고 여전히 세상의 향락을 좋아하고 기웃거리고 그것을 끌어들인다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못된 습관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16절을 보면 주님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긴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저들과 언약을 맺고 결혼하여 그러한 음란한 문화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16:4)라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세상은 더욱 더 음란한 세상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이 정신을 차리고 우리 마음에 그러한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은근히 그러한 것들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11~1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아멘!
여러분 인간은 무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기 전에 우리들은 다 녹슨 총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에 묻혀서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었고, 지혜가 없어 잘못하며 살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서 늘 악에 굴복하며 살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또 천하 보다 귀한 생명을 악한 일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쇠나 강철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어느 것에도 굽혀지거나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기 속에서 나온 녹(綠)에 의해서 부식되고, 결국은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도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녹슨 무기, 고장 난 무기처럼 패기처분만 기다리던 우리들을 주님은 새롭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보배 피로 우리 죄를 다 닦아 주셔서 인간 본래의 형상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의 과거의 죄를 쫒아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성능을 다 발휘하여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에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서 쫓겨 나간 죄가 우리 주변에서 배회하다가 틈만 생기면 다시 들어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은근히 매력적으로 들어오는 악한 이방 문화와 언약을 맺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녹슨 인간이 되고 악의 종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마음대로 쓰시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언약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맺기 전 먼저 6,7절과 같이 하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 선포하심으로 언약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scientia est potentia]고 했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자비라는 히브리 낱말의 뿌리가 여자들의 “아가 집”을 뜻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는 여인이 자기 배에서 나온 아가에게 느끼는 그런 애틋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느끼심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리고 때로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로 인하여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할 그 때에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에게 자비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고통을 연민의 정으로 보시며 우리의 고통에 동참해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러한 따스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 품을 늘 그리워하고 그 품안에 날마다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죄인을 멸시하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에 주님은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측은히 여기시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춰주시고 제일 좋은 음식인 주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표현은 본디 “콧김이 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숨을 가쁘게 쉽니다. 그래서 콧김이 짧게 됩니다. 하지만 인내하고 참을 때는 콧김을 길게 합니다. 결국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은 주님은 좀처럼 노여워하시지 않고 인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내하시면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 참으시다가 도저히 안 되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화를 냅니다. 그런데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시편 37:8)고 했습니다. 한 번 같이 해 보시지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네, 의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분노하면 "혈관이 수축되어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되지 않으며, 혈압이 높아져서 호흡이 곤란하고, 심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화가 난 상태에서는 올바른 사고 작용이 불가능하므로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분노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출32:19). 그러므로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닮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사랑과 진실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자 또는 사랑이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해서 지킬 도리를 끝까지 빈틈없이 다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하나님 쪽에서 하실 일은 조금도 빠트림이 없이 다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타락해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실 때도 남은 자를 남겨두시고 또한 포로된 자들을 다시금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출애굽기 20:6절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런데 여러분 한 대를 삼십년 정도 잡아보면 천대는 삼 만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은 한 마디로 끝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자손손 세상 끝날 까지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제 아무리 애써 봐도 실수하기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며 때로는 일부러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사람일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악과 과실과 죄(허물과 죄와 잘못)를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말투로 말한다면 “번쩍 들어 치워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죄악은 우리 인생의 걸림돌입니다.(겔14:3) 은혜와 복을 받는데 막대한 지장이 되는 무거운 걸림돌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번쩍 들어 치워버려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곧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지속적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끝가지 붙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한 번 약속했다가 쉽게 취소하기도 하지만 또한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유리 주님을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 후서 2:13절에서“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한 번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변개치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진실을 경험하며 살아가다가 마침내 시 23편 6절에서 다윗이 외친 것같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감격적으로 외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잘못된 것을 그저 눈감아 주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어떠한 죄를 짓는다 해도 그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미 미래의 모든 죄도 다 용서해 주셨으니까 라고 하며 방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앞서 천대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 하신 하나님은 또한 “아버지의 허물을 자녀들과 손자들과 증손 자녀들과 고손 자녀들에게 미치도록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필 삼사 대까지냐? 그럼 그 다음 오대 자손들부터는 괜찮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리했던 것처럼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서 한 지붕 아래나 한 마을에 삼사 대가 함께 사는 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문에 속한 한 사람, 특히 우두머리 되는 사람이 하나님께 잘못하면 그 가문이 몽땅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삼사 대까지 조상의 허물이 미친다는 말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할 수 없어서 내리시는 벌은 그냥 한 시대에만 그치고 만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최소한으로 벌하신다는 뜻으로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을 저지른 한 조상 때문에 삼사 대가 어려움을 겪는 다는 것은 천대까지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씀과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가벼운 벌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시려 하지만 잘못한 것까지 다 잘했다고 할 수는 없으시므로 징계하시고 벌을 내리시기는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벌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주시고 은혜는 많이 베풀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앞을 지나가시면서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큰 소리로 알려주시자 그 말씀을 들은 모세는 경외심으로 서둘러 땅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며 이렇게 아룁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이 말씀은
여러분 하나님은 출애굽기 33:15절에서 이미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모세는 다시금 주님께 동행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원어를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오셔서 '합세' 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간구를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이 크신 분으로서 저 같은 사람을 그저 어여삐 보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이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거스르기를 잘하는 백성인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오니 앞으로도 저희들 한 가운데 오셔서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몸소 이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로 하셨으니 이 백성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도록 해 주셔야지요. 하나님의 것을 이 백성에게 물려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저희 심령 속에, 우리 교회 한 가운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3:17)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마음 한 가운데, 인격의 중심에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해 주셔서 저들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붙들어 주시고 삶의 길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언약이 깨지고 관계가 잘못되었지만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은 다시금 언약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어 새 언약의 백성된 우리들도 때로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약속을 깨뜨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약속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 찬송가 370장처럼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더욱 근신하여 쉽게 약속을 깨뜨리지 않고, 금송하아지 같은 것을 섬기지 않고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라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찬송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과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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