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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사랑하신 은혜 (요13:1~11) | 박승남 | 2008-1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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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브랜드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 치료전문가였습니다. 그가 나병환자를 돌보며 영국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뒤꿈치에 감각이 없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핀을 뽑아 찔러보니 전혀 감각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공포와 절망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혹 자신이 나병에 감염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찔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내 인생 속에 간섭해 오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밤 또 안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일어나서 행여나 하고 자기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복숭아 뼈 아래를 질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리한 통증이 갑자기 전신을 엄습해 옵니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이 격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자기가 장시간 여행을 통해서 잠시 자기의 몸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자기 평생에 이처럼 고통을 인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 처음이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잡혀진 날은 빠르게 가는 법입니다. 벌써 유월절 전날, 고통당하실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때가 이른 줄 아시고”(1절),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십자가를 지실 때입니다. 이제 이 밤만 지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합니다. 주님은 그 죽음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진정 엄청난 고난과 희생과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절박한 순간에 살 궁리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비관하고 절망하고 괴로움에 빠질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때에도 자신이 아닌 제자들을 생각하셨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주셨습니다.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는 제자들을 한사람씩 불러 발을 씻기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제자들은 거부할 수 없이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대로 발을 맡겨드렸습니다. 여러분 당시 발을 씻겨 주는 일은 주로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었지만 선생이시오 주님이신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주님이 제일 먼저 씻긴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의 식사법으로는 식탁에서 옆으로 누워 왼팔은 몸을 받치고 오른쪽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세 사람일 경우 중간 좌석이 상석이고 그 외 머리 쪽 즉 외쪽에 둘 때 그리고 오른 쪽에 세 번째의 손님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후 만찬 자리를 어떻게 배치했는가는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는 23절 말씀을 보면,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스듬히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왼쪽에 앉은 사람인데, 그는 다름 아닌 가롯 유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다음으로 상석에 앉은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인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제일 먼저 씻어 준 제자도 다름 아닌 가룟유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가룟 유다를 가장 영광스런 자리에 앉게 하셨으며 또한 그의 발을 가장 먼저 씻겨주셨을까요? 이것을 해석해주는 말씀이 바로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사랑하시되”라는 말씀은 일시적인 행동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은 끝없이 계속되어 간다는 뜻이고,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은 철저하게(utterly), 온전히(wholly),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가롯 유다까지를 포함해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마귀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넣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이 말은 유다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장 영광스런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마귀는 무서운 반역의 마음, 배신의 마음, 미움의 마음을 불어 넣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다가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시고, 종이 하는 모습 그대로 자신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면 가롯 유다가 회개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려고요? 만일 그것이 다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show를 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심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당신의 고향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아시고는‘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정말 멋지게 생긴 남학생이 보기에도 민망하리만치 못생긴 여학생이지만 옷 하나만은 기막히게 잘 차려 입은 여학생과 지나갑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말합니다. “저 여자애 아버지가 재벌인가 봐.” 그러지 않고서 저 잘생긴 남학생이 저토록 못생긴 여학생과 데이트할 리가 만무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반대로 매우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자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외모의 남학생과 데이트를 합니다.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저 남학생이 사법고시에 붙었나 봐.”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너무 못생긴 남학생이 지지리도 못생긴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며 지나갑니다. 그러자 이를 본 학생들이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얘들아, 쟤들 정말 사랑하나 봐!” 사람은 사람 그 자체를 변함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상황과 여건의 제약을 받습니다. 네 조건이 변했기 때문에 내 사랑이 변하고, 내 여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 사랑의 질이 바뀌고, 우리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의 내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행하는 사랑의 한계요, 그렇기에 아침의 사랑이 저녁에는 증오와 배신으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어 부르신 곳은 갈릴리 바닷가입니다. 때는 평상시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돈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이 높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전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남보다 의롭고 진실하였기에 사랑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셨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신할 사람들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언제까지라고요? ‘끝까지’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배신하고, 네가 나를 욕하고, 네가 나를 증오하더라도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얼마나 느껴보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감사해 보셨습니까?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와서, 베드로를 씻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하고 거부하고는 강한 어조로 반대하고 나섭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그러자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는 그렇다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하고 몸을 내밀었습니다. 왜 처음엔 베드로가 주님이 자기 발 씻기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좋게 생각하면 발 씻기는 일은 주로 하인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이신 그분이 발을 씻긴다니 너무 황송해서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나라에선 발을 씻기는 순서가 그날 만찬 석에 앉는 순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귀한 손님을 제일 먼저 씻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베드로를 제일 나중에 씻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만찬에선 주님께서 베드로를 천대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성격에 화가 나서 발끈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무시를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발끈할 수 있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이 귀하게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교회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는데 어느 순간 무시를 당하고 외면을 당하는 것 같고 하나님도 알아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순간 화가 나고 발끈하게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또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순서야 어떠하든 예수님은 그날 제자들을 세상에 가장 존귀한 자로 대하고 있으며,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세상을 떠날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힘들고 외로울 때입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다 받아도 그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을 때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자발적으로 제자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심지어 생명까지도 털어 바쳐 사랑하시는 사랑, 목숨 다할 때까지 그리고 그 너머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신 이들은 바로 ‘자기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어 주시고 자기에게 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어쨌든 오늘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온 여러분을 주님은 자기 사람이라고 하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기‘끝까지’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목표’,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실 뿐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고집이 담겨 있는 표현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고 말겠다는 예수님의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는 고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왜 실수합니까? 분명한 목적과 목표 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 대한 목적과 목표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나면 결혼이라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결혼을 해서는 ‘우리의 가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하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셀을 맡은 리더는 자신의 셀에 대한 목표와 목적이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힘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목표와 목적이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가 8장 6-7절을 보면 이같이 말씀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아시겠습니까? 죽음같이 강한 우리 예수님의 사랑, 어떤 물도 끌 수 없으신 불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아시겠습니까? 이 사랑이 죽기까지 당신을 내어 주신 우리 예수님의 사랑인 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처지와 어떤 형편이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아픔과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그 누구의 사랑보다 더 강렬한 우리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 하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래 위의 발자국에서처럼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그 시절에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업고서 그 길을 가시고 계십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업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49:15~16) 우리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은 지금도 계속해서 여러분과 함께 그 모래 위를 걷고 계시는 끝없는 사랑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여러분과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도 끝까지 그 목적과 목표를 위하여 이루어 가실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도 가룟유다처럼 배신과 불신과 미움과 어둠과 원망, 불평으로 나가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빛으로 그리고 감사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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