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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발을 씻겨 주라 (요13:12~20) | 박승남 | 2008-1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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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발 반사요법’이니‘발 마사지’니 하는 말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땅을 밟을 기회는 물론이거니와 걷는 횟수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언제TV에서 하루 평균 걸음 횟수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보통 남자가 3000보 정도고 여자는 그나마 시장도 가고하며 다니다 보니 3500보정도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걸음 횟수 하고 건강과는 많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장이 동맥을 통해서 맑고 깨끗한 피를 공급해줍니다. 온 몸에 골고루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과 세포 조직까지요. 심장에서 제일로 먼 곳이 발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의 박동만 의존해서는 돌아가지를 못합니다. 즉, 발걸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발과 뒤꿈치가 땅에 닿음으로 해서 펌프작용을 해 준답니다. 그래서 발이 제2의 심장이라는 말이 나왔답니다. 만약 충분히 걷지도 않고 발을 만져주지도 않으면 한마디로 말한다면 유해독소가 발바닥에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깨끗한 피만 돌고 돈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다 쓰여진 혈액은 정맥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유해독소가 있어 맑지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중요하고도 소중한 발을 위해 첫째, 신발은 가능하면 편안한 신발을 신어야 하겠습니다. 특히나 여자들의 경우엔 하이힐 등 발가락을 모이게 하는 신발을 신게 되면 나중에라도 발의 변형이 일어나 두통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답니다. 두 번째, 시간을 내서 매일같이 족욕을 해 주십시오. (간단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40도정도의 따뜻한 물에 1분 찬물에 30초 정도로 여러 번 번갈아 넘어주면 혈액순환에 그만큼 좋답니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번 주 각 셀에서 세족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은 이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는 내가 행한 깊은 뜻을 과연 헤아리고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영적인 일에 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한 뜻을 모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행하신 일이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것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이 우리 속에 계속 일어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삶의 본보기이신 사랑과 희생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셨고 주님이 품으신 마음, 그 비전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순종할 주님이시오 우리가 배우고 따를 참된 교사이십니다. 그래서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그야 말로 아름다운 인생, 승리하는 인생, 복된 인생, 세상에 유익을 주고 생명을 얻게 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교사는 많습니다. 하지만 참된 스승은 드뭅니다. 스승이란 머릿속에 지식만 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한 것은 실천하며 그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본을 보여주고 따라올 수 있게 하는 이입니다. 이러한 스승이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이시오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리고 16~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결국 주님의 뜻,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서로 발을 씻어 주라 그러면 복이 있을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어떠한 것입니까? 1. 끝까지 사랑하신 마음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가 대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과 어떤 사람이 가깝게 지내면 그 사람마저도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이 증폭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고 맞는 것이라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거절하고 싶고 받아드리기 싫은 무엇인가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기 쉽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억압된 사슬을 끊어야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결심하고, 악한 자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 할 때에 왜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가 당신을 팔고 제자 공동체를 어지럽게 할 것을 아시면 서도 그대로 두셨을까! 그것을 뽑아내지 아니 하셨을까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롯 유다만 없어지면, 저 사람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텐데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얼마나 잘 못된 생각인지 모릅니다. 어디를 가도, 어떤 공동체에도 가롯 유다는 있다는 것입니다. 제2의 가롯유다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고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언젠가 그 사람이 변화될 것을 기대해서도 아닙니다. 그가 자기를 배반 할 것을 아시면서! 자기를 등질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랑하신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의무만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페라가 상연됩니다. 그런데 그 주제가 바로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있을 때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유산 달라할 때도, 집나갈 때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나 돌아올 까 저제나 돌아올까 동구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때는 어른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달려가서 그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기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때 아들은 어떻했겠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다가 뒤늦게 절실히 깨닫게 되고는 얼마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한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이 고마웠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조그만 마음에 안 들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무시합니다. 지난 주 셀 모임 교재에 이러한 질문을 넣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당신이 사랑(좋아하고 가까이)했다가 혹은 당신을 사랑했다가 어색해지고 멀어지고 미워지고 싫어진 경우들이 있다면 말해 봅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변해지고 달라진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말해 봅시다. 그러면 셀 가족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습니까? 왜 우리의 사랑은 변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요한1서 4:7~8절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 함께 주의 나라를 일구어 가기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못난 제자들이었을지라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뤄지는 나라입니까? 사랑으로 섬김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KBS 드라마 세종대왕이 끝났는데 마지막 회에서 유명한 말이 두 마디가 있는데 하나는 중국의 칙사 왕진의 입을 빌어 한 말로 한 사람의 눈먼 자가 만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이요, 또 하나는 장영실의 입을 빌어 한 말로 세종은 가장 큰 자요, 가장 낮은 자로 단 한 명의 백성도 그에게는 하늘이요 땅이요 우주였다고 한 말입니다. 여러분 그만큼 세종은 백성들을 지극히 섬겼다는 것입니다. 실명하면서까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늘과 땅, 우주처럼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의 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종은 일국의 왕으로서의 낮아졌다면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더욱 한 없이 낮아지시고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발을 씻겨 주신 것은 주님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누가 더 높으냐? 라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적으로 생각한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서보려는 생각으로 집착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철없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주님 자신이 이루려고 하시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행함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전에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2~45) 그리고 이렇게 섬기려 오신 주님은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발을 씻겨 주신 동작 하나 하나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무릎을 끓어야 하셨습니다. 이는 무릎을 꿇고 낮아지지 않으면 상대의 발을 씻길 수가 없고 상대를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고하게 서서 나의 허영심을 채우면서 사랑하겠다고 하면 진정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과 낮아짐이 있을 때, 진정 사랑은 사랑이 되고 섬김은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섬긴다고 시늉은 하면서도 겸손과 낮아지는 없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만 할 뿐입니다.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고, 고통을 줄 뿐입니다. 주님은 겉옷을 벗으시고는 허리에 수건을 동이셨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 발 씻음을 받았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5:5) 수건을 겸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주님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교회에는 화려한 겉옷을 입은 사람보다 수건을 두른 종들이 많아야 합니다. 즉 때밀이가 많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저 또한 때밀이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만 '목사'라는 옷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들을 위해서입니다. 목욕탕 안에서 손님과 때밀이는 같은 신체조건을 갖고 있지만 때밀이만 팬티를 입는 것은 전적으로 손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들이 때밀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가운도 때밀이의 팬티와 같습니다. 모든 면에서 여러분들과 다를 바 없지만 여러분들의 영혼의 때를 밀어야 할 때밀이기에 목욕탕 같은 성전 안에서 가운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는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죄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때를 밀수 있습니다. 저는 제 설교로 교우들의 영혼의 때가 다 씻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어느 장소이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한다면 그 어떤 죄의 때라도 씻음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스스로는 나는 교우들 등의 때를 밀어주는 정도의 사명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슴과 팔다리는 쉽게 씻을 수 있겠지만 등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를 통해서 전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더욱 정결하게 하시고 점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섬김은 세상의 섬김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섬김은 낮은 사람이 높은 분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제자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하인이 상전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훈 하신 섬김은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상전이 하인들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겨 주는 것입니다. 선배가 후배를 섬겨 주는 것입니다. 직분 있는 자가 직분 없는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직분이 중한 자가 직분이 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한 없이 존귀하신 주님은 천한 죄인인 저희들을 섬기시려고 높은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자녀, 그의 제자, 그의 백성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 하나님의 나라까지 이어지는 교제를 갖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발은 우리의 지체들 중에 가장 더러운 부분으로 땅과 가장 가까이 있는 부분입니다. 옛 어른들은 머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사람의 머리를 함부로 타 넘고 다니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머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발은 아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머리를 씻어주시지 아니하시고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발이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베드로도 발을 씻겨 주시는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만 하고는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런데 여기 상관이라는 단어는 몫, 분깃, 유산, 일부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내 안에 한 자리(몫, 분깃)를 가지지 못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씻음 받지 못한다면 천국에 분깃, 유산이 없다는 말씀이고 영생의 유산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무나 유산을 받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과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중 네가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되기도 하고 교제가 끊어진다는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게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곧 교제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양말과 구두를 신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발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어릴 적에는 의자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발을 씻지 않아 고약한 냄새를 풍겨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게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곁에 누가 가까이 가려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교통을 의미합니다. 서로 참된 교제를 의미했습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야 만이 교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새까만 발로 집안으로 들어온다면 자신은 괜찮지만 그러나 식구들과 교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씻으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씻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실 목욕하는 것 귀찮습니다. 그러나 성숙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목욕을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잔칫집에 가면 다리를 뻗고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그런데 만약 냄새나고 더러운 발을 뻗고 있다면 사람들이 가까이에 오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교제를 통해서 천국까지 이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교제를 할 수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통을 위해서 우리의 더러워진 부분을 씻기를 원하십니다. 발은 세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발이 가는 모든 것은 우리의 행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가면 또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가운데 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할지라도 더럽혀 집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더러운 소리 가 내 귀에 들려옵니다. 교회밖에 나가자마자 귀가 더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않지만,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 인해서 마음에 미운 마음이 생깁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이것이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거듭났다 고 할지라도 깨끗하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러워진 부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주님과 교통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늘을 이 땅에 심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씻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게 하셨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또한 주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시간마다 때마다 우리를 씻어주시려고 오라고 하십니다. 씻으시는 목적은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교제가 계속되어 하늘나라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발을 씻김으로 서로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고 겸손히 섬김으로 주님의 나라, 주님의 비전을 일구어가고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지는 교제를 계속해서 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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