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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눅7:11~17) 박승남 201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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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7:11-17 예수님의 마음

 

34년 전일입니다.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는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경기도 덕소에 있던 냇가에서 교사 위로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너무도 슬픈 일이 있었으니 당시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어린이 성가대 지휘자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그곳은 물이 깊지는 않으나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겹치는 곳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인천에 있는 은행에 다니고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성경학교도 하지 못하고 더욱이 위로회도 못 갔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이지만 월말 결산작업 관계로 퇴근하지 못하고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청년회 집회에 참석 못하게 됨을 알리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곧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은행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온 교회 특히 청년들과 어린이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던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어디로 가시려는지 서두르시더니 가버나움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여 내려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예수님의 뒤에서 행렬을 지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어떤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킬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 심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다볼산 길을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걷고 또 걸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다볼산을 넘어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의 하루 종일 걸어서 이제 다볼산 남서쪽 3km 남짓한 곳에 위치해 있는 나인이란 성의 입구에 당도하셨습니다. 나인은 가버나움에서 30마일(48키로)이나 되니까 요즘 차로는 40분 정도 걸리는 시간이지만 당시로는 온전히 하루 길이 되는 셈입니다.

주님이 나인 성문에 이르렀을 때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성문에 이르렀을 때 성안에서는 이색적인 행렬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행렬은 장례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은 성문을 향하여 가고 있었고 장례행렬은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유대나라는 무더운 나라였기에 사람이 죽으면 즉시 장례를 치렀고, 만약 너무 늦으면 다음날 아침에 매장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은 그날 오전이나 오후 어느 시간쯤에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행렬에는 그 성의 많은 사람이 함께 한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니 온 마을 사람이 거의 다 상여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유족으로는 오직 여인 한 사람뿐이었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비통한 죽음이기에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슬픔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 주려고 함께 한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요 따뜻한 배려입니다.

그러면 가슴 아픈 사연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유족인 여인이 남편을 여윈 과부요 또한 죽어 장사를 치러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과부의 독자였다는데 있습니다. 남편은 무슨 사연이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아들 하나 남겨놓고는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아온 것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를 먹여 살리려고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요즘은 그래도 여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지만 그 옛날에는 여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단지 남의 집 추수할 때 가서 이삭이나 과일을 줍는 다든지 산에나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풀 등을 뜯어와 먹든지 아니면 마음이 좋은 이웃의 구제에 의해 사는 것 등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아들 하나 부둥켜 않고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실로 가난 속에서도 오직 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소망으로 삼고 살아온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들이 장성하여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동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병인지 모르나 갑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가졌던 꿈이 일순간에 사그라진 것입니다. 참으로 비애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경제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도탄에 빠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가련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빠졌으므로 이 여인이 큰 슬픔 중에 울며 아들 장례 행렬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당한 처지를 생각하며 온 마을이 울었습니다. 온 마음이 탄식하였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이 장례행렬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시인 셀리는 그의 작품 아도나이스에서 “누구의 마음도 찢어지지 아니하고 지내는 날이란 단 하루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 이 민족 어느 구석에선가 찢어지는 슬픔을 안고 비통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버질은 그의 불후의 시 한 구절에서 “만물에는 눈물이 있도다”라고 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의 눈물과 실의는 바로 우리 인생의 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설사 지금은 행복하고 지금은 웃고 있을지라도 언제 이러한 비통한 울음을 울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주님이 절망과 슬픔의 장례 행렬을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곧 연민의 정을 느끼셨습니다. 가슴으로부터 뜨겁게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슬픔이 곧 주님의 슬픔이 된 것입니다.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들이 얼굴을 깡마르고 옷은 다 떨어지고 힘없이 걸어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가슴이 쓰리고 감정이 북받쳐 오고 울음이 터져 나와서 도저히 아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달려가 아들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린 그 마음입니다. 본문 13절의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은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볼 때 가졌던 바로 그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불쌍히 여기사 또는 측은히 여긴다는 말은 복음서에는 거의 예수님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장례행렬 뒤에 따라가는 어머니를 보고 느낀 주님의 감정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가장 큰 슬픔을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한다”(렘 6:26)고 표현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같은 감정이 되었을 때는 말이 나오지 않고 울컥 울음이 쏟아져 나옵니다. 주님은 즉시 그 여자를 보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사람마다 찾아와서 한 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고정하세요. 이제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산 당신이나 살아야지, 울지 마세요.” 그래서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은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비록 이렇게 위로의 말은 해 주었지만 울지 않아도 될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고통을 당한 가정, 엄청난 슬픔을 당한 가정에 가서 위로의 말을 하긴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큰 위로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의 위로는 사람의 위로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슬픔의 조건을 제거해 주시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주십니다. 그래서 울지 말라 하신 말씀은 이제 내가 너로 하여금 울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겠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청년이 누워있는 관 앞으로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능력의 손, 사랑의 손, 생명의 손을 그 관에 대신 것입니다.

이 관은 버들가지와 같은 나뭇가지로 역은 기다란 바구니였습니다. 그리고 이 관은 뚜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얹으시자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하여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14절)

 

여러분 주님 앞에는 죽은 자나 잠자는 자나 똑같습니다. 깨우면 죽은 자도 잠자던 사람처럼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치 잠에서 깬 아이들이 말하듯이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왜 나인이란 마을로 가셨을까요? 이 과부의 슬픔을 미리 보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 주시려고 가셨을까요? 아니면 우연히 가시다가 장례행렬을 보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 주셨을까요? 아무도 이 대답을 명확히 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인이란 마을은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볼산을 넘어서 므깃도 쪽에 위치해 있는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마을입니다. 주님의 활동무대는 갈릴리였고, 이 지역에 오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로 그 날에 나인으로 가셨을까? 우리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과 이 죽음의 행렬이 만나는 장면을 놀라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보라!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을 다시 번역하면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보라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다. ” 는 번역이 됩니다. “보라! 생명의 주님의 행렬과 죽어 무덤으로 가는 행렬이 마주치게 되었다.”

 

여러분 성경에는 가난한 자들이 시달림을 받고, 고아들이 짓밟히고, 과부들이 착취당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명은 하늘에 닿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해도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어나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난한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비천한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콧물을 흘리는 고아 사이에

하나님과 굶주린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앞길이 막막해 한숨짓는 사람 사이에

어떤 약속, 어떤 성스러운 약속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68:5절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고 시146:8~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형편을 보신 주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제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난 이 청년은

생명이 약동하는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난 이 청년은 넘치는 희망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비통하게 한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과 감격을 주는 효성스러운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근심, 걱정케 하고 슬프게 한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을 주고 유익을 주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리, 의인의 자리, 천국 백성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역사하면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만져 주시면 생명이 약동하게 되고 기쁨과 소망과 웃음이 넘치게 되고 유익을 주는 소금과 빛의 사람이 됩니다. 의인의 길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인성 과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설움에 겨워 통곡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아들을 살려주셔서 그 허물어져 버린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또 나인성 사람들 앞에서 아들을 살려주시는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앞으로 일어날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님 자신이 메시야이시고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고쳐주시거나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먼저는 어려움에 처한 자들,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도와주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셨기에 도우신 것뿐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도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먹이셨고,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도 단순히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연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소자 하나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2)고 말씀하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비애와 슬픔을 바로 자신이 당하시는 것처럼 느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주님의 연민의 정,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입니다.

소자 하나도 버리지 않고 돌보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예수님의 우리의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생명과 빛이 되십니다.

주님은 바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후1:4)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사람들의 위로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정을 주님 앞에 다 내어놓으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은 무엇인가 여러분을 위하여 행동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그 여인은 진짜로 울지 않아도 되도록 하셨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그렇습니다. 그 아들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어머니, 피멍이 들었던 어머니에게 돌려주신 것입니다. 받아라. 다시 살아난 그대의 아들이다. 이 때 이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녀의 기쁨은 그 얼마나 컸을까요? 그녀는 얼마나 큰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동시에 얼굴에 얼마나 환한 웃음이 가득했을까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는 인생을 웃을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괴로운 인생에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편히 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병든 자에게 치료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불행한 자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고 절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를 증거 해야 합니다. 자신 있게,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복음을 전할 때 생명의 역사를 일어납니다. 이 복음을 전할 때 사는 길이 열려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합니까?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이 은사 받았어도 저 은사 받았어도, 또한 우리가 유식하건 무식하건 그 목적은 전도에 있습니다. 구원의 반대말은 멸망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는 마귀 손에 있는 인간을 빼앗아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는 예수 믿는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 지구촌교회와 여러분을 통하여 귀한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귀하게 여깁니까? 물질입니까? 지식입니까? 아니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입니다. 한번은 프랑스의 대군이 독일의 남쪽 바바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바바리아 성은 싸움에서 승산이 없을 것을 알고 항복의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군의 장군은 성을 향하여 명령하기를 "여자만은 살려 준다 각자 귀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성을 나와라" 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여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명령을 받았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잠시 후 성문에는 여자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자기보다 더 큰 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니 그것은 모두 자기 남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바리아 여인들의 남편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감격한 프랑스 군대의 장군은 프랑스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모두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은 생명을,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귀한 정신이 있을 때 우리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지역사회가 살아납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여러분의 가정, 이웃의 귀한 생명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힘쓰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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