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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시8:1~9) 박승남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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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1~9 사람이 무엇이기에

 

다윗은 오랫동안 불행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습니다.

우선 가족관계 속에 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 눌려 살았던 아들이어서 늘 광야에 내 보내져 양을 치며 누구의 인정을 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는 소외감, 외로움, 인정받지 못함, 무시당함 같은 상처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겐 아무도 없다. 여러분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본문과 골리앗과 싸움 전 기사 외에는 아버지나 형들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27: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에게 얼마나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래서 여기 저기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광야 길을 걸어야 했고 답답한 굴에도 들어가야 했고 블레셋 땅으로 도망쳐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죽음의 위협을 수십 번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민족을 어려움에서 구하고 충성되게 헌신한 일 뿐인데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쫒아 다니고 죽이려 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또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심지어 아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 급히 도망을 쳐야 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험난한 일을 만났을 때 얼마나 고민이 컸겠습니까? 얼마든지 실의와 좌절감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때는 밤입니다. 장소는 광야인지, 풀숲인지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달과 별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밝게 빛나는 별과 하늘의 수많은 별을 보았습니다. 웅장한 우주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인터넷을 뒤져서 별과 우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모아 보았습니다. 잠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광대한 하늘을 바라보니 그에 비해 자신을 보니 다윗이라는 존재는 너무도 작았습니다. 너무도 초라해 졌습니다. 너무 외로웠습니다. 기가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을 보고 별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을 발견했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없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주신 달과 별들을 보오니

그렇습니다. 다윗은 달과 별들,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주 만물을 만드셨다고요? 네, 손도 아닌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여기 손가락이라는 말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손가락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나요? 저도 못합니다. 손으로 만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대 자연을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바로 손가락으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깨닫게 되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광활한 대 자연을 만드는데 하나님은 손가락만 까닥하시면 됩니다.

옛날 어느 목사님이 미국을 다녀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한국은 발로 만드시고 미국은 손으로 만드신 것 같다.” 그런데 미국에 사시는 이연길 목사님은 “미국은 발로 만드시고 한국은 손으로 만드신 것 같다”라고 합니다. 한국은 금수강산이기 때문이랍니다. 어느 것이 맞는 말씀 같나요? 아무튼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니까 이렇게 주의 손가락이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를 멋지게 드러낸 것입니다.

여러분 시란 긴 이야기를 짧게 만들어야 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선택입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긴 이야기를 짧게 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어떻게 긴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줄어서 말한 것인가? 그러면서 그 내용을 어떻게 감칠 나게 만들 것인가? 라는 고민을 시인은 하는 것입니다. 5월은 아름답다 라는 말보다는 5월은 병풍의 난초도 꽃피는 계절입니다. 참 감칠 맛 나는 말이지요.

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렇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우주,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다가 거기에서 인간인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약하고 초라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이 둘을 비교하다가 순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뭉클하며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 광대한 우주보다 인간을 더 생각하시는구나, 바로 이 부족하고 약한 나를 더 생각하시는구나? 나 같은 인간을 생각하시고 돌보아 주시는구나! 다윗은 우주와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이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로 좁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아~ 우주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이 이렇게 나를 생각하시고 주님이 이렇게 나를 돌보아 주시는구나? 순간 눈물이 핑 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도시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얼마나 작게 보이겠습니까? 점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점 중의 점, 그러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얼마나 크게 보일까요? 점 중의 점 중의 점 중의 점~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문제를 보실 때 얼마나 심각하게 보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씨는 그의 저서 [당신으로 충분하다]라는 책에서 아빠에게 받은 묵은 상처를 드러내면 자신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혜, 엄마를 대신해온 언니의 간섭 때문에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해인,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상정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는 미수, 외로움과 관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유아독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미란이라는 여성을 등장시킵니다. 이들은 모두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사는 30대 여성입니다.

여러분 이 여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낙심하고 고민하고 힘들게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인간관계 문제 때문에, 물질 문제, 질병 문제 때문에 기타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상처 받고 좌절하는 분은 없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회의에 빠져 있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가 태산처럼 커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그것은 점 중의 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그걸 해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문제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 놓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문제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시편의 저자인 다윗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주가 이렇게 큰데 우주에 비해서 티끌만도 못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생각해 주십니까? 우리를 그렇게 위하십니까? 오는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어떻게 오늘도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십니까? 어떻게 지치고 곤한 내 마음을 만져 주시어 평안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그 광활한 우주 만물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께서는 기껏 손가락을 그러니까 매우 쉽게 간단하게 창조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경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그토록 크게 보이는 문제와 인생의 시련도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간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물을 손가락으로 지으신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시려고 하신다면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우리 교회를 도우시려고 하신다면 하나님에게는 그 방법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웅크려들고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면, 실망과 좌절에만 빠져 있다면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비록 부족하지만 못났지만 초라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어 하고 간구하고 기다려 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이렇게 생각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세밀하심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히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가슴 깊이 느끼다 보니까 그는 더 놀라온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5절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창세기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신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관할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여기 그의 발아래는 하나님의 발아래가 아니라 사람의 발아래입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뭘 뭘 다스리게 하셨나요? 7~8절을 보십시오.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이 만드신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과 바다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음을 믿으십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피조물 중에서 가장 힘이 셉니까? 가장 몸집이 크고 가장 키가 큽니까? 그렇다고 날줄을 압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더 키가 크고 힘이 센 짐승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지 않으시고 사람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우리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도록 하나님께 권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바로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나가다가 보니 그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위대한 분이시구나~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린 [당신으로 충분하다]책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사람이 어떤 상처를 지녔든, 어떤 결핍이 있든 자신은 상처보다 훨씬 큰 존재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상처가 됐던 경험들, 억울한 감정, 분노했던 마음을 드러내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감정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점차 안정감을 느끼고, ‘내가 노력할 필요가 없구나, 나 자체로도 괜찮구나’라는 걸 조금씩 실감하며 치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을까요? 바로 주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자존감이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각종 상처 때문에~ 그런데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의 자존감이 회복되어지고 얼마나 높아졌는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기죽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태산 같은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에 싸여 헤매겠습니까? 진정 다윗은 주님에서 긍정적인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고 주님 안에서 치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총을 깨달은 다윗은 결론적으로 1절과 2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저 하늘 높이까지 주의 위엄 가득합니다.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하나님과 나를 비교해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높여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이 땅과 하늘과 바다까지 다르시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이러한 감격의 고백, 감격의 선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야,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얼마나 아름다우냐~ 주의 영광이 온 천지에 다 퍼져있구나~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신 분이냐 라고 찬양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있던 것들이 극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고통과 어려움에 짓눌려있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문제가 하나님 안에 녹아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만은 자기를 인정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버리고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인정하신다면 더 이상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후부터 다윗은 자기에게서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갇혀 지내던 그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실망, 상처, 원망, 두려움, 억울함, 낙심, 근심, 걱정, 불안 등등의 마음에서 해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미엔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기 달걀을 깨고 나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 속에 내가 진입을 하면서 내 자신이 폭발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억울한 감정들,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로 당당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냐,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지 않냐~ 라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2, 36)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4:18) 그리고 사도바울도 외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진정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이러한 자유 함을 누리시고 해방감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 주의 대적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천지를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과 역사 속에서의 통치,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자신의 권세나 돈만을 믿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거만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통해 나타나는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느냐?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 라고 오만방자하게 지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이러한 주의 대적 때문에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술 한 마디로 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하게 잠잠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21:1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에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라고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어린아이보다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고백이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역설적 교훈'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권능을 세우십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고 지혜가 있을까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힘을 통하지 않고 '입'을 통하여 권능을 세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주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위대하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만난 것 같긴 한데 힘없는 주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초라한 주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럽니다. 주님은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그런 주님을 뭐라 믿습니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광활한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생각하시고 그 분이 우리를 주의 깊게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을 높이십시오.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어린 아이와 젖먹이 같이 겸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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