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기는 마음(눅10:25~37) | 박승남 | 2013-06-30 | |||
|
|||||
눅10:25~37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질문에 의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해발 780m의 고원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나 낮은 지대에 있습니다. 즉 바다보다 250m나 깊은 곳이 바로 여리고 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급경사 내리막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35km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지만 굴곡이 심하고 산 계곡을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에 강도의 위험이 많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나무가 많은 산은 아닙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바와 같ㅇ디 너른 광야이며 황폐한 땅인 황야입니다. 그리고 높은 바위산과 깊은 계곡이 있기도 합니다. 강도들이 이런 계곡에 숨어 있다가 나그네를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혼자 가다던 이 사람은 아주 악한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악한 강도들은 이 사람을 에워싸고 넘어뜨린 뒤에 옷을 다 벗겨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강도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그 사람이 소유한 짐승이며 돈이며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자기 직무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제사장들은 여리고에 살고 있었고, 자기 당번이 되면 그 기간 동안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일하고 일이 끝나면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그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여 지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겁했습니다. 조금 후에 한 레위인이 그곳으로 지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제사장과 똑같이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이름조차도 유대인들은 수치로 알았던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개종하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매치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원래 한 핏줄이었습니다. 모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북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점령한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피가 섞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북쪽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이라 하여 천히 여기고 상종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강도 만나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은 과연 이러한 유대인을 도와주어야 하겠는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살려준다면 나중에 은혜도 모르고 “내 보따리 내 놓으라”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겠는가? 우리 같은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고 개나 돼지같이 여기는 이 사람을 과연 도와주어야 하는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 만일 여러분이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 여러분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 아니 여러분의 원수가 어려움을 당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배신감 느끼도록 행동하는 북쪽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습니다. 천대를 받고 살던 사마리아인이 그리고 지나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게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는데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단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인가요? 어떻게 원수 같은 유대인을 그토록 돌보아 준 것인가요?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바로 33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렇습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인들은 감정이 내장, 심장, 폐, 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이 내장들이 다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심장, 간, 폐들이 다 아파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을 복음서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팔랑크니조마이는 곧 인간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36절을 보면 예수님은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4:14절에는 주님께서 벳세다 광야로 나오는 큰 무리들을 보시고 느꼈던 마음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34절에는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소경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78절에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7:13절의 나인성 과부의 슬픔을 보셨을 때,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는 죽은 청년 독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으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마음으로 죄인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리했던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기적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주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품은 마음을 즉 불쌍히 여긴 마음을 말씀하여 주심으로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은 바로 이처럼 깊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가진 사마리아 사람은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선 사마리아인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당시에 기름은 안정제이고,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 때문에 방부제로 썼다고 합니다. 의사들의 대부 히포크라테스는 종기 치료법을 설명하면서 “부드러운 양털로 싸매고, 포도주와 기름을 뿌려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보십시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했는가를! 응급치료를 한 후에 그는 강도 만난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자기가 타고 가던 나귀에 태웠습니다. 여러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나귀에 태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나귀에 태웠으니 자기는 나귀를 끌고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막이 있는 데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사진에서 보신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풀 한 포기 없는 햇빛만이 작렬하는 사막 같은 길입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는 걷고 환자는 나귀에 태우고 주막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음날 주막을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환자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꼭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상당한 재산을 들여 정성을 다해 도와 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야말로 예수님이 지어내신 이야기로 압니다. 그런데 주석가 푸룸머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사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은 제사장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사람은 천사로 묘사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다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었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고도 예수님께서 무사하셨다면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 하신 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다시 되 물으셨습니다. “당신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가서 이와 같이 하시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못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통 사람들이면 다 그렇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아마 그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반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두 가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이웃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슴이 다릅니다. 바로 그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를 욕하고 나를 박대하는 사람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성령께서 그 일을 도우십니다. 이 마음을 품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율법사에 예수님께 물을 질문과 이야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되물으신 질문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즉 어려움과 고통을 당한 자의 이웃이 되느냐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이야기 할 때 내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이 보아서 누가 이웃인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지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줄 사람이 누구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도, 서기관도 다 자기들은 사랑이 있고, 선한 이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볼 때 이들은 선한 이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우리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나와 좋은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좋은 이웃이 아니다.” 여러분 오늘은 북한 선교주일입니다. 북한 선교와 북한동포를 위해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북한 사람들에게 선교가 잘될까요? 여러분 지금 북한에는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흉년이라는 강도, 위정자라는 강도, 굶주림이라는 강도를 만나 쓰러지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북한 주민이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을 구해 보려고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탈북자들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탈북동포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 접경지역에는 천명이 넘는 무명의 선교사들이 북한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선교현장의 특수사정 때문에 서로 횡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탈북동포가 북한에서 국경을 넘을 때 “십자가 있는 곳을 찾으면 살 수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들의 희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면 밥과 의복을 주고 돌아갈 여비를 제공해 줍니다. 탈북한 모습 그대로 다니면 다시 북한 특무대에게 혹은 중국 공안에 잡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목욕시키고 이발을 시키는 일을 기독교인들이 은밀하게 행하게 됩니다. 좋은 시설의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목욕을 마치고 이발을 하고 식사를 제공해 주면 생전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는 일에 감격하면서 “이제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친절과 사랑을 받고 여비를 받아 북한 땅 자기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때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종교는 아편이고, 기독교는 미제의 앞잡이로 북한을 황폐하게 만든 원수라고 배웠던 잘못된 인식이 깨끗이 사라지고 예수님, 교회, 복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열린 마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들은 훗날 통일이 되면 다른 누구보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4월에 개성공단이 문을 닫았습니다. 북한은 일시에 5만 4천명의 북한 근로자들을 다 철수시키고 우리 정부도 모든 주재원들을 100% 귀환케 했습니다. 개성공단에 올인한 기업들이 80~90% 되는데 이렇데 되니 회사가 폐사된 상태가 되었으니 그분들은 지금 집에서 애나 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서 잘되었다 하는 이들도 있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지난 6월 노회 남북한선교통일 위원회 주관으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여기 강사는 개성공단에서 개성교회 목회를 하시던 분인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개성공단이 얼마나 소중한 역할을 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개성공단이 완전히 폐쇄되게 되면 어느 쪽이 더 손해를 볼 것인가? 라며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중요한 개성공단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감당했던 중요한 역할 그리고 실제적으로 입은 경제적인 손실은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북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입은 경제적인 손실 매우 큽니다. 더욱이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전시분위기가 되어졌을 때 입은 손실은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우선 우리가 외국에서 들어오는 차관의 이율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퍼주었다고 하는 돈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분위기가 조성되었던 1주일동안 주식시장에서 빠진 그래서 손해를 본 금액이 6조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가 퍼준 금액이 OECD에서 각 회원 국가에게 어려운 나라에게 원조하라고 한 분담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천안함, 연평도 사건 등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개성공단이 있으므로 얻는 경제적인 유익도 매우 크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공단 자체가 한반도와 우리 국민에게 주는 유익은 1)개성공단은 남북대회의 채널이 되었다는 것이며 2)통일이 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데 개성공단에서 남과 북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이질적인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것을 하나씩 극복해 가는 연습, 훈련을 하면서 통일의 모델을 만들어 내는 장이 됨(외래어 문제, 오징어를 낙지라고 말함, 낙지를 오징어라고/ 족발을 발족) 개성공단 같은 것을 수십개 수백개 만들어서 경제적으로 북한의 15~20%를 차지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가 모든 주도권을 갖고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3)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우월성을 교육하는 장이 됩니다. 이는 어떠한 지도자, 권력, 단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엔 남쪽에 있는 차 다 몰고 왔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절대 그런 말 안 함. 우리가 잘 산다는 것 이제는 다 알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오늘의 현실 6.25직후와 같습니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것은 미군부대에 취직한 것과 같습니다. 매우 부러운 일이지요. 월급은 150불은 북한 당국에서 거의 다 떼어가고 북한 인민들의 평균임금인 2,500월~3,000원 (1달러 정도)밖에 못 받지만 그들은 공단에 와서 고깃국을 먹고 초코파이, 라면 등을 얻고 여러 부수입을 얻고 있어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30만 명의 가족이 있습니다. 4)선교적인 차원에서입니다. (설교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면에서도 개성 공단이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한이 이런 저런 이유로 회담을 하지 않고 계속 문 닫은 상태로 있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진정한 이타주의는 동정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진솔한 동감은 한 사람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인격적인 관심으로 “공감”은 인생의 길가에 쓰러진 인류에게 베푸는 아주 특별한 필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사람의 고통, 질고, 무거운 짐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노력은 진정한 공감에 뿌리를 두지 않고 동정에 뿌리를 둘 때 실패합니다. 진정한 공감이 없는 동정은 자존감 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동정주의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달러는 인생의 여리고에 누워 있는 상처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공감하는 손길들이 이 돈을 배분하지 않는다면 기부자나 수혜자 모두를 풍요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부정적 행동을 한다면 실패할 것이며 지구상의 빈곤과 무지와 질병을 없애기 위해서 긍정적인 노력을 한다면 성공할 것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돈은 맛없는 소금과 같으며 그 어떤 것에도 무익할 뿐이며 사람의 발아래 짓밟힐 뿐입니다. 진정한 이웃성은 인격적인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맞은 사람의 몸의 상처를 싸매기 위해서 그의 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마리아인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서 흘러넘치는 사랑을 방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아 줌으로 사마리아 사람도 자신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려운 사람그리고 특히 북한 동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은 비단 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들이 치유받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주님은 평화와 통일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잠언 16: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과 행위 아닙니까? 만약 훗날에 우리 민족과 역사가 “너는 통일을 위해, 북한 동포들이 어려울 때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 우리 주님께서 너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말씀드리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 모두 북한 선교와 굶주리는 북한동포, 중국에서 헤매는 탈북동포 와 이들 위해 수고하는 무명의 선교사들을 위해, 그리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3년 6월 23일 북한선교주일 설교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