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예수 그리스도) (사42:1~9) | 박승남 | 2014-0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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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2:1-9 여호와의 종(예수 그리스도) 어느 목사님이 말씀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제주도에 갔는데 교회에서 집사님 가정에서 운영하는 어느 펜션에 숙소를 잡아 놓았습니다. 오후 집회를 위해서 차로 교회로 태워주시는 그 집의 남자 분에게 “집사님이세요, 아니면 장로님이세요” 하고 물었더니 이제 교회 나간 지 4개월밖에 안 된 왕초보, 제주도 말로 ‘물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충만해 보이고, 분위기는 장로님 같으신데요.”라고 했더니,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산이 좋아 젊은 날은 1년의 몇 달은 아예 지리산에 묻혀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첫아들을 낳았는데 이름도 아예 지리산이라고 지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한라산이 좋아 20년 전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한라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친구들과 하산주를 마시는 기쁨으로 얼마 전까지 살아왔는데 그러다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잃은 것이 많다고 합니다. 주일날 산에 가야 하는데 산에 못 가니까 친구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하산주하는 재미를 다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7년 전에 아내가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입원도, 치료도 할 필요 없이 그냥 집에 모시고 가서 편안하게 잘해 드리라는 의사들의 권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기도하는 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은혜를 받아 급속도로 진행되던 말기 암이 그냥 스톱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기 암 상태로 몸에 암 덩어리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다가 7년 동안 진행이 되지 않으니까 3개월에 한 번씩 서울 삼성의료원에 와서 검사를 하는데 의사들이 아예 연구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의사들의 말대로라면 이미 7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의사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기적입니다. 당신이 믿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지난 3개월 동안 먹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어떤 운동을 하고, 무엇을 하면서 지냈고, 마음 상태는 어떻게 보냈고, 신앙생활은 어떻게 했는지를 묻고 이야기하면 열심히 받아 적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도 그 사실을 7년 전부터 알았지만 등산 마치고 내려오면서 하산주하는 재미만 최고인 줄 알아 신앙생활을 바로 시작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생각도 할 수 없는 은혜였다고 흥분하여 고백 하는 모습이 싱그러워 보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땅,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오랜 시간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포로로 붙잡혀와 노역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희망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장밋빛 미래도 없이 한 많은 노예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대에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천 형(天刑)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 생각지도 못했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주인공이 말하던 내용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 그 바람 같은 마음을 잡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란다.” 바람 같은 마음, 그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이라는 작가의 혜안이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도 어렵지만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요? 하물며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상을 섬기고 범죄한 사람들, 그래서 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요?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 있어서 조건을 많이 따집니다. 만약 조건을 따진다면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좋아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건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사랑하셨고, 우리도 엄청나게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자 봐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자, 내가 택한 사람이다. 너희를 사랑함으로 너희를 위해 그를 내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 나타나서 진심으로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나를 도와주고 위로 격려해 줄 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보라고 하시는 종은 누구입니까?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시는 여호와의 종은 누구입니까? 요한이 세례 주던 장소는 여리고 가까운 요단강의 여울목인 베다바라 혹은 에논 강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생각됩니다. 이 지역은 출애굽 했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애굽도 바로 그 지역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에 참여하시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까지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즉시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하늘이 갈려져 열리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은 바라보고 계셨고 열린 곳으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 같은 형태로 성령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 자리를 차지하시고 이제부터는 메시야인 그 분과 함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사용한 용어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실상 이 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처럼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례 받고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어떤 그룹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오직 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때로 자기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바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2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라 나의 종을! 이라고 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실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에게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의 가장 큰 임무는 온 천하에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공정한 재판, 혹은 재판을 통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재판, 불합리한 재판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죄가 있는 사람을 무죄 석방시키기도 합니다. 최근에 납북된 어부가 간첩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29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일이 보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당시 민간인 수사 권한이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에게 불법 연행된 뒤 구금 돼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까? 그런데 성령 충만한 여호와의 종의 사명은 연약하고 억울한 사람을 재판을 통하여 정당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1절 끝에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리고 3절과 4절에 또 한번 나옵니다.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정의를 베풀기 위해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베푼다'는 말은 법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율법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관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받아먹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함에도 정에 끌려 가난한 사람 편을 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고 하십니다. 그야말로 공정한 재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이런 나라가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그 나라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면 거기는 불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그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사역을 하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일반적으로 정복자가 어느 도시에 들어갈 때는 크게 떠듭니다. 또한 세상 임금이 행차할 때 고관대작들이 주위에 호위를 하고 앞에는 군인들이 가면서 악대를 울리며 온 세상 앞에 나팔을 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종은 정의를 구현할 때 목소리를 높이거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을 들추어내어 백성들 앞에서 재판하는 수다도 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백성을 만날 때 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의 소리를 듣게 하려고 악을 쓰거나 나팔을 불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조차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분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7절을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예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욕과 박해 속에서도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기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 않으셨고 가까이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씀은 날카로운 화살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는 학자의 혀를 가지고 있어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였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사50:4).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씀하시지만 듣는 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복종하는 놀라운 기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온유했지만은 무기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하셨지만 사람을 잠자게 만드는 그런 고요가 아니었습니다. 온유함 속에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력이나 허세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하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도 큰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화나서 감정 풀이하느라, 누구와 싸우기 위해 큰소리를 치지도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기 위해 나팔을 불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온유 겸손하게 감당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다가 갈 때도 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설득해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드럽게 말해도 성령은 역사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화를 내지 않고 우리를 대적하고, 멸시하고, 괴롭힌다 할지라도 성내거나 큰 소리 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내거나 욕을 하시지 않고 도리어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온유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아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3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여러분, 갈대는 강가나 호숫가에서 자라는 풀의 일종으로 다른 풀에 비해서는 상당히 크고 강한 것 같지만 나무에 비해서는 몹시 약하고 또 꺾이기 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꺾여 버리고 상해 버립니다. 짐승이 한번 지나가면 밟아 버리면 다 꺾여 버리고 맥없이 쓰러집니다. 그래서 갈대는 약한 자의 상징처럼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갈대가 그러하다면 상한 갈대야 오죽하겠습니까? 연약하기는 꺼져 가는 등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하신 하나님의 표준에 비추어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다 꺼져 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들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변에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이 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멸시받는 자들이나 병들어 버림받는 자들, 실패하여 그야말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 늙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고독하게 사는 사람들은 조금만 다치면 다 꺾이고 쓰러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작은 자도 우리가 잘 돌보아야 할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와도 같습니다. 언제 무슨 일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특별히 관심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상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꺾이지 아니한 갈대를 보시듯이 그들에게도 구원받을 소망이 있다고 보시어 그들을 특별히 찾으셨고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여서 성전의 백향목 기둥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간음한 여자는 성난 사람들의 돌멩이 앞에서 그 생명이 꺼져 가는 등불과 같았는데도 예수님은 그녀를 끝까지 지켜 주셨듯이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들으시며 까지 연약하고 병들고 죄인이라 낙인찍혀진 이들을 아끼시고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뜨겁게 사랑하여 주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천대받던 사마리아 여자도 불쌍히 여기시어 끝없는 정욕의 갈증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어 놀라운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또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도 들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은 오늘도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은혜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십시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보면 용기를 잃고 실망하고 절망할 수 있는 일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수 없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헤롯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체포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게 하였습니다. 또한 철부지 군중들과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빵을 주고 기적을 행할 때는 수 없이 몰려들고 예수님을 떠받들었지만 조그만 어려운 말씀을 하고 또 십자가를 지시게 되자 하나 둘씩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그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셨고 마침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셨습니다.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드러내시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 의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믿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리고 히브리서 10:38~3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포기는 김장할 때만 쓰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그 당시에는 통신망도 없었고 교통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섬들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앙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5~7절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은혜의 해, 기쁨이 넘치는 희년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도 여호와의 종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과 긍휼과 인내로 종의 사명을 감당할 때 결국 우리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종으로서 이 어두운 세상에 별과 같이 빛나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이론』에서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정호승 시인은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에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라고 노래합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빛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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