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몬1:4~22 ) | 박승남 | 2014-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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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1:4~22 아름다운 사람들 몇 년 전 KBS에서 도망친 노비를 쫓는 드라마를 방영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노비는 화폐가치로 계산되는 사람들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라 유사시엔 사고파는 것은 물론, 선물로 주기도 했고,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숫자가 조선 시대 초기를 지나 폭발하더니 급기야 임진왜란 직후인 1609년. 한반도 전체 인구의 47퍼센트, 한양 전체 인구 53퍼센트까지 육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양반들과 평민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수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도망쳐 인간답게 살려는 이가 있었고 반면 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망쳤다가 잡힌 노비들은 그 얼굴에 한자로 남자는 종, 노예라는 奴자를 여자는 여자 종 이라는 婢자를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시대에도 노예가 도망하다 붙잡히게 되면 "도망자"를 뜻하는 "Fugitive"의 첫 글자인 "F" 자를 빨갛게 달인 인두로 이마에 낙인을 찍어 어디를 가도 금세 드러나게 해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는 도망하다 붙잡힌 노예가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 박아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도 했고 원형극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에게 던져져 로마인들이 즐기는 피의 축제를 위해 사자와 싸우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주인 마음대로 죽이거나 다른 어떤 고통을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네시모를 노예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바울이 품어주고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주인과의 관계는 아직까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에게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는 늘 마음에 죄짐을 지고 살아야 할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돌려보내려 합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도망친 노예가 어떠한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주인인 빌레몬가 사도바울이 잘 아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래도 당시 노예를 처형하는 법에 따르게 되면 오네시모가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 오네시모를 보내지 않고 빌레몬에게 편지만을 띄워 억지일지라도 승낙을 받아 곁에 두고 봉사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인이 아무리 잘 알고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흔쾌히 승낙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뭉개버리고 잊고 싶은 과거에서 도피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 청산하므로 사랑과 용서를 통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당시 노예제도가 불의한 것이었다 해도 주인의 물건까지 챙겨 가지고 도망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안다 해도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가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 주인이 죽이든 살리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에 대한 책임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죽음으로 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네시모는 어떻게 했나요? 아무리 이러한 뜻을 가진 바울이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려 한다 해도 정작 당사자 오네시모가 가지 않으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앞에서는 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것이 비록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과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동시에 요즘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교회, 책임을 지는 사회입니까? 문제는 이곳저곳에서 수없이 일어나지만 그 일에 대해 시원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산 안창호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과 사회에 대해 책임감이 있는 이는 주인이요, 없는 이는 객이라”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이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나아가서는 지식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일곱 가지 성품, 습관의 사람이 성공하게 만들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삶을 주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주도성 인간, 주도적 체질의 사람, 주도적 습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도적이다'라는 말은 "내가 책임진다."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책임지는 만큼의 왕국, 영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책임 내가 지면 내 왕국에 사는 것이요,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지면 그 사람도 내가 다스리는 것이요. 내 책임과 남의 책임까지 많은 사람들의 책임까지 다 내가 느끼고 살면 그 사람은 그 만큼 넓은 영역의 인생을 사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반대로 잘못된 책임,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나는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인으로 사십니까? 아니면 객으로 사십니까? 주도적으로 사십니까? 아니면 무책임하게 사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오네시모는 그렇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주인이 있는 골로새로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 14:24~25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모두 예언을 한다면,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이나 새로운 신자들도 그 설교를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양심에 찔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털어 놓은 뒤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은 참으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고 고백을 할 것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오네시모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으며 하나님께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며 예배드리는 신자가 되었고 또한 바울을 통해 신앙 양육을 잘 받아 이제는 바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바울의 말씀에 따라 그가 쓴 편지 하나를 달랑 들고 빌레몬에게로 간 것입니다. 무려 3,000km를 걸어서 말입니다.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자신의 삶을 책임져 주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공은 빌레몬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러면 과연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어떻게 했을까요? 어느 날 도망친 그것도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가 눈앞에 다가섰습니다. 이 때 빌레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빌레몬은 부자요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하여 자기 집이 교회가 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성도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동시에 믿음도 돈독했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이라면 쉽게 받아들였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종은 아니더라도 같은 신앙생활 하다가 내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 해를 준 사람, 못되게 굴다가 사라졌던 사람이 어느 날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기분이 어떠할까요? 그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형들을 용서한 요셉을 생각할 때 요셉이 그 형들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셉이 얼마나 그것이 힘들었는가, 형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로웠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구 대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창세기 42장 24절을 보면 요셉은 형들과 말을 주고받다가, 그들 가운데서 시므온을 끌어내어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끈으로 묶었습니다. 여러분 대 제국의 총리가 부하를 시키지도 않고 자기가 직접 시므온을 끌어내어 포박을 한 것입니다. 이 때 그의 마음이 대단히 격했던 것입니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었던 것입니다. 분한 마음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형들의 진심어린 뉘우침 때문이었습니다. 빌레몬도 용서하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가 크리스천이고 사도바울의 부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용서해주었다.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재산과 권위에 손상을 입힌 용서할 수 없는 종을 처벌할 권리가 있었고 또한 바울의 요청을 거절할 권리도 그에게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는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부탁대로 형제로 맞아들였고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로서 맞아들여 함께 수고하도록 했다. 소설가 펄 벅 여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죄를 찾아내서 벌을 주어야 되지만 죄를 덮어주고 허물을 가려줄 때 벌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벧전 4:8절에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빌레몬이 영접해주기 전까지는 오네시모는 도망자의 딱지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습상 노예를, 더군다나 도망한 노예를 한 형제로 간주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도 믿지 않는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뭐라했겠습니까? 하지만 빌레몬은 그러한 것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사랑과 믿음으로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사도 바울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은 실수나 과오, 죄를 범한 사람을 언제든지 다시금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과오를 범한 사람이나 탈선한 사람들을 너무나 지나치게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러한 사람을 두 번 다시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믿고 있으면서도 우리들 자신이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패의 밑바닥에 있는 바로 우리들을 믿어 주신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과오를 범하게 되면 옳은 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를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인 것입니다. 비록 속는 줄 알면서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데는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젊은 암사슴이 불행히도 자신의 귀여운 새끼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아직 젖이 불어서 유방이 여전히 탱탱할 때 숲 속에서 호랑이 새끼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암사슴은 불어서 새끼들에게 쏟지 못한 사랑과 정을 그 호랑이 새끼들에게 마음껏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미 잃은 새끼 호랑이들에게 젖을 먹여 엄마의 몫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 암사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걸세. 사랑과 정을 쏟는 데도 상대를 가려야 하네. 어쩌면 그 호랑이들이 자네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 괜히 자신의 젖을 낭비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 암사슴은 차근차근 대답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요. 지금 나에게는 단지 엄마로서의 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내가 이 호랑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다면 내 젖이 나를 몹시도 괴롭힐 거라고요." 바울이 무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를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바울의 형편상 도망한 노예를 비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빌레몬이 섬기는 교회인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서 보니 바울 곁에 심복으로 봉사하고 있는 오네시모를 발견하고 그가 바로 골로새에서 보았던 노예임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네시모에 대한 전모가 밝혀졌고 이미 기독교인이 된 오네시모는 생명을 걸고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고, 기독교인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바울의 뜻에 따라 주인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 편지를 쓴 사도바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편지를 보면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모두를 잃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에게는 비록 자신의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고 싶었지만 빌레몬에게 보내 자신의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결국 평화, 화목, 화해를 일구어 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로 하여금 참된 자유인이 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처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들을 바라보며 불의한 노예제도를 공격하거나 노예해방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노예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변화시켰습니다. 쓸모없는 무익한 노예를 아주 유익한 형제로 변화되게 한 것입니다. 전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도망자 노예였지만 이제는 사랑받는 형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모든 불의한 제도나 구조 등을 무색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같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가 베풀어져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햇볕이 따스한 창가에 인형 세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흙으로, 또 하나는 유리로, 나머지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곳에 있었지만 햇빛을 받아들이는 모양은 서로 달랐습니다. 진흙 인형은 햇살을 받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유리 인형은 햇살을 받은 만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인형은 받은 빛을 수천, 수만으로 확산하여 주위를 온통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받은 만큼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이아몬드 인형처럼 크게 부풀려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유리 인형만큼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흙 인형처럼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아몬드 빛 같은 사랑의 빛을 받았던 사도 바울이 그 빛을 오네시모에게 비추어 오네시모로 하여금 에베소 지방에 찬란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나라 재상이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재상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라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었는가?" 재상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청했고 의기양양한 왕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재상은 곧장 재주가 빼어난 목수를 불러 왕의 외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게 하고 인형에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왕자의 유모에게 그 인형을 안고 부두에 세운 다리 위에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재상과 함께 배에 앉아 있던 왕이 유모를 보고는 왕자가 유모 품에 안긴 줄 알고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유모는 실수인 척하면서 일부러 인형을 물속에 떨어뜨렸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물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재상은 만류했습니다. "폐하! 친히 내려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왕은 "안 된다. 안 돼. 내가 구하러 가겠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안 놓여! 난 저 아이의 아버지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야 재상은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은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말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친히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끝까지 달려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빌레몬서는 짧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빌레몬서 말씀을 보면서 1)사랑과 용서(용납)-바울과 빌레몬 오네시모를 받아줌 특히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의 말대로 형제 이상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2)화해-바울이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3)책임짐-1)바울은 오네시모의 잘못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였도 2)오네시모는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면서 빌레몬에게 돌아갔습니다. 4)겸손- 바울은 명령으로 할 수 있지만 정중하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모델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특히 예수님은 죄와 허물, 잘못이 하나도 없으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우리를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화목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러한 아름다운 예수를 본받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3년 9월 0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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