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는 자의 복(시32:1~11) | 박승남 | 2013-08-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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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귀와 암말의 교접으로 태어난 짐승이 있으니 바로 노새입니다. 노새는 생식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몸이 튼튼하고 아무 거나 잘 먹어 부리기에 알맞은 짐승이지만 때로는 엉뚱하게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고집 센 노새와 노인을 꺾을 자는 없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노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미련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빗대는 짐승이 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저주를 할 때 노새("하르")라 하고 스페인에서는 미련하고 둔한 사람, 고집이 센 사람을 부르는 속어가 바로 노새(‘부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본문 9절에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노새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것은 다윗 자신이 한 때 잘못해놓고 노새처럼 어리석게도 고집을 부리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보았지요. 그래서 그는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노새처럼 되지 말라. 나처럼 고집부리다가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다윗이 노새와 같이 굴었을 때와 모습을~ 3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의 사랑하는 왕자 알버트가 죽었을 때 늘 슬픔의 그늘 아래서 지냈으며 그녀를 위로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녁만 되면 그녀는 한 시녀가 성경구절을 읽어주는데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시녀 중 하 사람이 여왕을 담대히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폐하, 침울하게 계시지 말고 기뻐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날 천국에서 성경의 위인들, 즉 모세, 야곱, 아브라함, 솔로몬, 다윗 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하고 여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다윗을 절대로 만나지 않을 거야!” 왜 그랬을까요? 다윗을 생각하니 그가 지은 죄가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언급하면 다윗과 골리앗 보다는 다윗과 밧세바를 생각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야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사무엘하 11장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간음과 살인교사죄를 저질러놓고도 안 그런 척 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자복할 기회가 있었지만 무려 10개월 이상 침묵했습니다. 내가 뭐 잘못했느냐고 하나님께 입을 열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지은 사실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고 속이고 기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죄 외에 영적인 죄를 더하였습니다. 여러분 고후7:1절을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하여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그의 양심이 살아 있어서 겪은 고통이었나요? 아닙니다. 4절을 보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라고 말합니다. 그가 침묵을 지키고 그의 죄를 고백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의 고통은 지은 죄에서 왔지만 더 큰 고통은 하나님이 자기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51:8절을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뼈가 꺾인 노인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로 새 힘을 얻고 상쾌함을 누리는 대신 그의 영혼은 메마르고 연약하며 살아가는 기쁨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소나기 같은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복을 누려야 할 그가 대신 영적인 가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징계는 반항하는 자녀를 회개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징계의 유익에 대하여 히브리서 12장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최상의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긋날 때, 범죄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6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주를 만날 기회는 하나님이 만나 주시려 할 때입니다. 또한 어려운 때, 고난의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때는 하나님이 만나 주시려 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자복하고 문제가 있으면 아뢰고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이라면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결과 홍수처럼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한 분도 영적 홍수의 피해를 당하는 분들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사야 43:2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시편 32편을 복사하여 그의 침대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매일 하나님을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죄인된 모든 인생에게서 가장 필요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즉시로 그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고 숨기려 하지 않았다면 그는 수개월 간의 말없는 고민과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침묵은 금입니다. 하지만 침묵이 황색 즉 단순한 비겁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손은 범죄한 다윗을 누르셨습니다. 진정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잠28:13) 그런데 죄를 숨기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던 그에게 죄를 고백할 기회,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을 만나서 새끼 양에 관한 이야기를 부드럽게 하였고 다윗은 자기가 젊을 때 목자였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폐하~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 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때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 너무도 멋진 말입니다. 너무도 정의로운 왕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못된 일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에 관한 일에는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입니다. 자기에게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때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죄를 들추어 낸 선지자에게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보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죄를 가리려 합니다. 경찰에 잡혀서, 청문회에 나와서 죄를 스스로 시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고위직에 있는 이들은 더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너무도 깨끗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의 입술이 열린 것입니다. 회개의 단초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드디어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자복합니다" 라고 하며 자신의 죄를 주님께 아뢰며 그동안 숨겼던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다윗은 자신의 죄를 4단어로 표현합니다. 허물, 죄, 죄악 그리고 간사함입니다. 허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에 고의적으로 불복종함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범죄와 같은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 죄는 반역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불복종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분명히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큰 죄인입니다.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여기 보는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마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간음의 수순을 밟게 되며 기회를 만들거나 기회가 주어지면 곧 간음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음욕을 품는다는 말은 욕구한다, 동경한다, 욕심을 품는다는 의미로 한 여자를 계속적으로 음심을 품고 바라보고 가장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그 마음에 간음의 결단을 내릴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간음은 이런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무서운 살인과 간음죄를 범하게 되었나요? 우리아의 아내가 옷을 벗고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강한 음행의 동경과 욕구를 품게 되었는데 이런 그의 성적 욕망이 그로 하여금 무서운 죄를 저지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러한 자신을 깨닫고 자신의 허물을 주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라는 말은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비뚤어진 것입니다. 이 죄는 알고도 지은 죄와 모르고도 지은 죄, 모든 죄를 포함합니다. 주님 앞에서 참된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면 죄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왜 사는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직분을 주시고, 왜 나에게 사업, 직장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고, 왜 나에게 공부를 하게 하시고 왜 나에게 살림을 하게 하시는지 그 뜻을 알지 못하거나, 잃어버리면 죄를 짓게 됩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사는 것입니까? 왜 일을 하고 공부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 고린도 전서 10:31절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서 어린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다니엘을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니엘을 기쁘게 보시고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나아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입니다. 죄악은 불법, 부정, 죄악, 사악을 말합니다. 그가 불법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사라는 말은 불성실을 말합니다. 그는 나라의 지도자, 왕으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불성실했습니다. 여러분 그가 이렇게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신의 저지른 죄가 얼마나 잘못되고 무서운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죄가 없습니까?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은 없습니까? 아직도 죄를 가리고 숨기는 것은 없습니까? 죄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어제 귀한 어르신 심방을 갔습니다. 그동안 절에 심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생각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마음을 만져주신 것입니다.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분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백성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복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하나님께 자복했고 그것을 시로 지어 모든 사람 앞에 공포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나는 허물과 죄와 죄악을 저지르고 간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죄를 자복하였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1~2절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가 가려졌습니다. 마음의 간사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죄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께 끌려온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신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를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용서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끄집어내 그 문제를 크게 대두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죄는 죄가 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정죄’한 후에 이루어지는 법적 용어입니다. 죄를 정하지 않고는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하신 것은 주님은 그녀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염연히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죄를 단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죄까지도 기억하지 않으시는 용서, 완전한 용서, 놀라운 용서입니다. 뒤끝이 전혀 없는 말끔한 용서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용서해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이러한 용서는 다윗에게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1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를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말로 자신의 죄를 주님이 들어올리시고 가져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려졌다는 말은 덮다 숨기가 감추다 입니다. 그동안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감추었는데 이제는 주님이 자신의 죄를 덮어주시고 숨겨주시고 감추어 주셨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리려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님은 가죽옷을 입혀 주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은 다윗을 죄 없는 사람으로 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의 죄가 엄연히 있고 그 죄가 자기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자복하니 주님은 그 흉한 죄가 없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글씨를 잘못 썼을 때 빨간 줄을 쳐서 없앨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와 같습니다. 용서는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내용은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하지 않는 것은 그 속에 있는 내용까지 없애는 것이다.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내 죄가 하나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부모도 정죄하지 않는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한 것을 다 지워버립니다. 여러분 죽을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용서를 받았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요? 돌아 맞아 죽을 각오로 자기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자유를 주신 그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그 용서와 함께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사람을 바로 살게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후 주님의 교회에 아주 소중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녀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여인은 진리로 자유함을 받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을 들어보면 용서가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가 고백록을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나의 형제들 때문입니다. 내가 범한 죄를 듣거든, 나를 위해 슬퍼해 주시오. 나의 구원을 듣거든 그러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슬픔과 찬양의 소리가 나를 에워싸고 서 있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나와, 높이 하늘까지 올라가기를 원해서 이 책을 쓰는 것입니다.” “나의 이 고백을 길 잃은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시오. 나와 같은 죄인, 약자, 길 잃은 자들이 결코 절망하지 않도록, 용기를 내도록, 주님에게 기대하도록.... 그리고 언젠가 내가 지금 하고 있듯이 후에는 그들도 입을 모아 주를 찬양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또 자기들의 고백을 이야기하도록.” 여러분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그의 고백은 사실 자기 죄를 고백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받은 큰 은혜를 찬양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시32편을 기록한 다윗도 그러한 마음입니다. 자기의 죄를 드러내고 만천하에 공개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주님의 은총을 널리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다윗은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기쁨, 참된 평화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그대들도 하나님이 주신 평화와 기쁨을 누려라 죄를 짓지 말고, 또한 그 죄를 계속 붙들고 있지 말고, 그 죄를 숨기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께 고백해라. 그러면 주님이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도 그리해 주시는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은신처가 되시고 환난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당신들을 두르실 것이다. 주님이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 주님을 기뻐하며 구원의 찬송을 부르는 사람, 주님이 주목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사람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고 난 후에 뼈저린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자백함으로 자백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조건 없는 용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해방과 행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복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한국교회는 소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잘 통하는 사람, 그리고 이웃과 백성들과 잘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왜 미움을 받습니까? 정치를 잘하고 잘못하고 이전에 소통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희들 생각은 나 못 따라와~ 하며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국민이 바보입니까? 진정 그가 다윗을 깊이 생각했다면 아니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생각했다면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여러분 소통의 최고의 원칙은 듣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복된 사람이 된 것은 바로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잘 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소리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십시오. 솔직하게 털어놓으십시오. 오늘 시32편은 회개의 기쁨이 얼마나 크냐를 보여 줍니다. 죄를 범하는 것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3년 8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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