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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거하라-순종과 복 3.21일 주일 낮 운영자 200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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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승남목사 설교일 2004년 3월 27일
창세기 26장 1 ~ 16절

이 땅에 거하라-순종과 복 3.21일 주일 낮

오늘 말씀을 보면 이삭이 살고 있는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옛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도 흉년이 들었었는데 또 다시 그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자들의 생활은 절망적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가축 떼를 이끌고 이리 저리로 왕래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은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한 곳에 장기적으로 머물기도 하고 곡식을 경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근이 들 때는 도시 생활에 유혹을 받기도 했고 특히 멀리 있지만 비교적 비옥한 애굽에 끌리게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삭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 가축들을 위한 풀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근이 언제까지 갈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두 아들 에서와 야곱과 종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고 했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부끄러움을 당한 일이 있었지만 지금 너무나 절박하니까 그러한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에 당시 블레셋의 수도 그랄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러할 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근이 들고 있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래서 “아니 하나님, 지금 기근이 들어 언제 굶어 죽지 모를 땅인데 무슨 대책도 없이 어떻게 이 가나안에 거하라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저도 안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죽하면 제가 애굽으로 가려 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느냐 마느냐, 비옥한 곳을 찾아 가느냐 아니면 기근이 든 자리에 머물러 있느냐? 참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할 이삭의 마음을 아시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삭아, 네 마음에는 이 땅에 어떻게 머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걱정과 염려가 몹시 되지. 그러나 내 말대로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


이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이 때 그 옛날 흉년 들었을 때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을 상기시키며 네 아버지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잘못하고 실수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아브라함이 순종했다고 칭찬하시면서 그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이 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어떠한 마음이었겠습니까? 한편으로 부끄럽고 황송한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하나님, 저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애굽까지 내려갔고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해 실수도 하였는데 저를 그렇게까지 좋게 말씀하여 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아브라함을 좋게 보셨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실수도 하고, 잘못한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중심을 보시고 또한 그가 행한 선한 일을 더욱 크게 보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지금 조금 잘못하고 지금 조금 허물이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문제가 있고, 지금 허물이 있고 실수를 하였다 해도 언젠가는 그도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무슨 차이가 있기 때문에요…….
이를 알기 위해 아브라함의 경우와 이삭의 경우와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는 무엇이지요. 기근이 들었다는 것도 같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것도 같습니다.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도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삭에게는 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명이나요. 여러분 당시 에서와 야곱은 장가들 수 있는 총각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애굽에 내려갔을 경우 애굽에서 예쁜 여자들을 보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눌러 삽시다.” 하고 애굽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 약한 이삭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눌려 지내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도 없게 될 것이고, 나아가 요셉이 팔려가고 나아가 총리가 되는 사건도 없게 될 것이며 이삭의 식구들은 그냥 애굽에 동화되어 그저 그렇게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도 물거품이 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라도 이삭의 애굽 길을 분명하게 저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더욱 분명히 보게 됩니다. 요즘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많이 나올 때는 15명이 드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실망이 되는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나는 이 특별한 기간에 우리 성도들이 특별히 힘써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이 새벽에 제가 마음에 두고 선포하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예수님의 고난당하실 것에 대한 예언과 모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렬하신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 같으면 좋은 계획을 세웠다가도 이런 저런 이유로 포기하고 중단할 때가 많은데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저녁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고난, 고통당하시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회심하는 사람들과 질병에서 치유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미국의 어느 한 소녀는 간질병에서 치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강렬한 의지와 그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삭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이 가려는 길을 강제로 막지는 않으시고 다만 그의 자율적인 결단에 맡기셨습니다. 이제 공은 이삭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이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샤마’ 라는 말인데 이는‘듣다’‘경청하다’‘순종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지 않고 듣는 것이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 깊게, 경청하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6절 말씀을 보니까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군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생각을 접고 그  시도를 중단하고 그냥 거기 머물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한편으로 돌아서서 본래 살던 곳으로 갔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내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하려는 생각,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렵게 결단해서 나름대로 다 준비해 놓았는데, 그것을 내 버리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려울 때도, 때로는 피나는 아픔과 손해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보석 중에 땅에서는 나지 않고 바다에서만 나는 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주입니다. 진주는 ‘아빌퀼리테’라고 하는 조개의 몸속에서 만들어 지는데 그 조개의 몸속에 모래가 들어가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아빌퀼리테’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조개의 몸속에 모래알이 들어온다는 것은 큰 고통이며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모래알이 준 이 아픔에 대해서 조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진주가 되든지 썩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주가 되려고 하면 ‘라카’라고 하는 특수한 물질을 몸에서 발산하면서 그 모래알을 감싸 안고 모래의 거칠한 부분을 점점 부드러운 조갯살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라카’를 배출할 때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참아 이겨내면서 ‘라카’ 를 만들어 대처해 나갈 때 모래알은 비로소 진주가 되어 최고의 보석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아픔과 고통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물론 그 순종은 엄청난 고통과 죽음까지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주님은 그 순종으로, 그 십자가로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여 주셨고 또한 그들의 구주로 높임을 받으시게 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삭이 순종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랄에 거합니다. 그런데 거기 거하는 것은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언제 이 그랄에도 기근이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낮선 도시에 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특히 그 옛날 아브라함이 사라 때문에 걱정한 것처럼 리브가도 아리따운 여자였기에 리브가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로 인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리브가가 자기 여동생이라 거짓말하는 잘못을 범했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부부가 포옹하는 모습이 들켜져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삭이 순종하여 그랄에 머물렀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의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삭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닙니다. 12~14절을 보면 1)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100배나 얻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근을 염려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저 먹을 것만 생겨도 감지덕지 할 텐데 놀랍게도 100배나 소출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삭은 유목민이지 농사를 짓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2)그리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3)그래서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 즉 남여 종들이 심히 많게 되어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런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따라 전도하다 지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얘들아, 우리가 저 저 높은 산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올라갈 때 커다란 돌을 두 개씩 들고 올라가자’하셨습니다. 그러자 따지기 잘하는 가룟 유다는 참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아니 힘들어 죽겠는데, 산은 왜 올라가자고 하시는 것이며, 게다가 돌은 두 개씩 가지고 올라가자 하시는 건가…….’ 그래서 조그마한 자갈돌 둘을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우직한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큰 돌 둘을 어깨에 메고 땀을 흘리면서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앉히시고, ‘자 각자 가지고 온 돌들을 자기 앞에 놓고 다같이 기도하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축사하시고 나니 돌들이 빵으로 변해 있습니다. 우직하게 순종한 베드로는 큰 빵을 얻게 됐습니다. 그 감격은 말로다 할 수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작은 빵을 가지고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순종에는 복이 따른다는 교훈이 들어있는 위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가롯유다와 같이 순종하는 척만 하는 때도 있고 또한 아예 불순종하는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여호와께서 복 주시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어려움도, 두려움도 갈등도 있었지만 순종하니까 마침내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이삭이 순종해서 복을 받았을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과 복종의 삶이 없으면 이삭의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했지, 우리에게는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러나 여러분 비록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오늘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교회정치 제3장 15조를 보면 교인의 의무 3가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1)공동예배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예배 즉 주일예배 등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을 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이유 없이 네 주일을 교회 예배에 출석하지 않으면 교인명부에서 삭제했습니다. 여러분 달력을 보면 주일은 모두 빨강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가던 길도, 하던 일도 모두 멈추라는 정지표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일과 주님을 위한 일 외에는 하지 말라는 적신호로 주님의 일 외에 하던 세상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면 위험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주일을 잘 지키는 나라는 번영하고 주일을 안 지키거나 주일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히틀러가 주일에 영국을 침공하였다가 웰링턴에게 망했고,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주일에 미국을 침공했다가 원폭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북한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남침하고 성도들에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가 지금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난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주일 교회에 안나가고 세상일로 분주한 사람은 학교 가는 날 학교에 안 가고 놀러 다니는 학생과 같습니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되어 있는 주일은 세상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뜻입니다. 주일을 지키되 정해진 시간도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2)헌금의 의무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헌금이 주일헌금이요, 헌금의 표준은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 23:23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3)그리고 치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치리라 하면 범죄자에게 내리는 견책 등을 연상할 수 있지만 치리란 교회를 다스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치리에 복종할 의무란 목회에 협력하는 것과 교회의 규정과 결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결의기관에는 공동의회, 당회, 제직회가 있는데 여기에서 결정된 사항이 분명히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복종해야 할 의무가 교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큰 순종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음 문을 열고 기꺼이 말씀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이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잎이 마르지 않고 의의 열매가 주렁주렁한 보람되고 알찬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정말 무엇이든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속에 거역하고 불순종하려는 악한 마음은 없는가? 그리고 지금 나의 환경, 나의 삶 속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7장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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