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주인이 오늘 그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불러오기 위해 시장터에 나간 것은 아침 7시경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그날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9시쯤 주인은 다시 동네의 시장터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일할 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주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상당하게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 주인의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역시 낮 12시경쯤에 주인은 시장터에 다시 나왔습니다. "왜 이 사람은 처음에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태풍이라도 불어온다는 뉴스를 들었나 보지!"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이 포도원 주인은 다시 나왔고, 불과 일할 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드디어 일이 끝나는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임금이 지불될 시간입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청지기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제일 늦게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게" 임금을 받은 그들은 놀랬습니다. 겨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다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너무나 기뻐서 흥분이 되었습니다. 7시에 온 사람들의 반절도 일하지 않았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니……. 특히 아침 7시에 온 사람은 더욱 더 그랬습니다. "저 주인은 아마도 시간당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 일하고서 우리는 한 달 수입의 반절은 벌게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설레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오후 3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지불될 때까지 그들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 사람이 무엇인가 실수한 거겠지? 아마도 저 인자한 주인은 청지기에게 다시 귀에 대고 그가 실수한 것이라고 아마도 일러 줄 거야.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지기는 12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침 7시에 와서 일한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럼,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는 상관없이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다는 말인가?"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아침 7시에 와서 진종일 일한 사람도 임금을 받았는데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이 “집주인을 원망하였다.” 원어로 보면 "불평, 불만하고 투덜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그대로 실을 수 없어서 점잖은 표현을 쓴 것일 것입니다. "아니, 나중 온 사람하고 동일하게 임금을 주는 것은 말이나 되는 거야? 가장 늦게 온 사람은 땀 흘릴 시간도 없이 고작 한 시간 일했는데, 한낮의 뙤약볕에서 진종일 일한 우리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 말인가?" 그들의 말은 거칠어졌습니다. 만일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데모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잠깐만,"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왜 더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까? 오늘 아침 당신들과 약속한 것을 잊었습니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한 것에 분명 당신들이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동의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으면, 당연히 우리는 좀 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는 더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주인은 말했습니다. "아니, 무엇이 잘못된 게 있습니까? 내가 관대한 것에 대해서 왜 당신들이 불평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들에게도 똑같이 지불하겠다고 마음먹었소. 그것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소. 내 돈은 내 마음대로 쓰는데 당신들이 왜 소란들이요. 당신들 돈을 받았으면 돌아가시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는 관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기분이 좋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몹시 불편하고 답답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어떻게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단 말이야? 이건 공평치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솔직하게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이 7시에 온 사람이라면 속상하겠습니까? 안 그렇겠습니까? 얼마나 기쁜 나쁘겠습니까? 세상에……. 이게 뭡니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 예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주인의 편을 드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임금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부터 지불하는 이유는 뭡니까? 그런데 5시부터 온 사람부터 줘가지고, 아침 7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잘못 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그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뻔히 다 지켜보게 해서 마음 부풀게 만들었다가 구멍 뚫려 푹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심사는 뭡니까? 설사 약속했다 해도 그렇지요.
일찍 온 사람부터 계산해 주면 되잖아요. 주인은 그에게 먼저 품삯을 지불하고 그들을 보낸 다음에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순으로 지불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랬다면 아마도 그 다음 날 아침 7시에 시장터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아마 오후 4시 40분 50분에 사람을 찾으러가는 시간에 맞추어 어슬렁어슬렁 몰려들 것이고, 오직 한 시간만 일하고 같은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겠지요. 그러니 자 이걸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이 이야기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담겨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첫 번째 실마리는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되는 장면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한 장을 깊이 관심하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의 요점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바로 지난주에 본 19장에 나타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젊은 부자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는 엘리트요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돈도 많은 부자이면서 종교적인 열정까지 가진 사람으로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삶이 바로 되어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량하셔서 제자를 삼고 싶어 하실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관원이 왔을 때 제자들은 어떠한 마음이었을 것일까요? 아연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수제자인 베드로가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니, 저런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내 위치가 흔들리고 빼앗길 것 같아…….” 그래서 내심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거든요. 사실 이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집 한 채도 없이 전세로 살고 있다면 쉬울지 모르겠지만 빌딩도 많고 좋은 아파트도 많이 가진 그런 사람에게 그거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한다면 그거 쉬운 일이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도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한편으론 휴~ 하고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실까……. 그런 말씀 하지 않으시고 내 제자라 되라 하시면 그냥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을 사람 같은데…….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른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여러분 예수님이 의미하신 것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주 살찐 낙타가, 그것도 커다란 혹까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낙타가 조그만 바늘귀로 들어가는 그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겠네요.” 제자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래, 사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단다. 하나님이 하시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시몬 베드로가 나아와서 이렇게 말을 하고 맙니다.
"예수님,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여러분 이 말은 베드로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베드로의 실언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은 19:30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나아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른 자는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도 똑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요.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미루어 보면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비즈니스 거래, 이익을 남기려 하는 장사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투자 했으니 얼마나 거두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일찍부터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예수님 모셨으니까 내가 많이 받아야지. 내가 좋은 자리, 좋은 직분을 얻고, 좋은 것을 차지해야지.”
“내가 이 교회에 일찍 나왔으니까, 내가 봉사를 많이 했고,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하고, 내가 좋은 직분을 차지해야 하고, 내가 더 높아져야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결국 스스로 속임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자신은 많은 것을 받으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생각만으로 자신을 따른다면 나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여기 나중이란 말은 마지막의, 가장 가치 없는, 가장 작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열심히 수고했을지라도, 먼저 되었다고 자랑하지 마라. 천국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바와는 정 반대로 그런 사람이 가장 가치 없는 자, 가장 작은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을 비즈니스로, 장사로 생각한다면 너는 가장 가치 없는 자가 될 것이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곧바로 따라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인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도 어떻게 스스로 속임을 당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비교할 때 나보다 일을 더한 사람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과 비교해 보기 보다는 늘 나보다 적게 일한 사람과 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고, 저 사람은 나보다 일을 적게 했고 …….” 그러면서 은근한 우월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나야 말로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이것이 우리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내가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일평생 교회를 섬겼고, 말씀을 따라 바로 살려고 노력하고 좁은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임종 자리에서 겨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과 함께 같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을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는가?"
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이 과연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과연 여러분은 몇 시에 포도원에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7시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아니면 9시 12시 3시 아니면 5시에 온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분? 여러분은 몇 시에 오셨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아침 7시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투덜투덜, 불평불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5사에 온 사람 같다면 감지덕지고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나 같이 얼마 일하지 않은 사람을 이렇게 대접해 주시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
자 그러면 주인은 5시에도 왜 사람을 포도원으로 부른 것입니까?
그것은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놀다가 빈손으로 마음 아프게, 쓸쓸하게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왜 5시에 온 사람도 1 데나리온을 주었을까요?
그 사람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그 가족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1데나리온은 하루의 생활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하루를 굶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주인을 원망하고 항의를 한 것입니까? 자신이 받을 것이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원망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약속한 대로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망한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배 아파서입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일 5시에 온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면, 자기 동생이라면 어떠할까요? 그래도 불평할까요? 어떻겠습니까? 아니겠지요. 기뻐하고 감사했겠지요.
자, 이제 여러분이 3살, 6살, 9살 먹은 세 자녀를 둔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세 살 먹은 아이보다 9살 먹은 아이를 세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물론 9살 먹은 큰 아이는 나이는 세배나 더 먹었고, 가장 오랜 시간 부모를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당신이 9살 먹은 아이라면, 당신은 세 살 때 했던 것보다 부모님을 세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인 걸요?" 그렇습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를 주었으니 얼마를 받겠다는 즉 give and take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사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창세기 43장 34절을 보면 형제들을 만난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주었지요. 다섯 배나요. 그런데 형들이 그것을 싫어했습니까? 원망 불평했습니까? 아닙니다. 형들은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동생이 더 많이 받았기에 저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만큼이나 한 가족으로서 기뻐한 것입니다.
여러분 5시에 온 사람이 바로 내 가족이라면 차라리 그가 나보다 2배 아니 5배를 더 받아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입니까?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될 때, 직분 자 선거 때 교회 오래 다니고 더 많이 봉사한 것 같은 나는 떨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장로로, 안수집사로 권사로 선출되었을 때 속상하고 화가 나고 시험에 든다면 물론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가족은 진심으로 축하해 줍니다. 왜 내 가족이 잘 됐으니까……. 여러분 부모는 어떻습니까? 자녀가 나보다 더 잘되기 원합니다. 나보다 더 공부 많이 하기 원하고요. 나보다 더 출세하기 원하고요. 나보다 더 잘나기 원합니다. 나보다 잘 난 것이 더 기쁩니다. 이것이 가족이요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을 장사로 생각하지 말고 가족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라. 만일 장사로만 생각하면, 내가 받을 것만 생각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치 없는 자, 가장 낮은 자, 가장 나중 된 자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포도원인 교회를 섬길 때 5시에 온 사람의 마음으로 충성하고 또 5시에 온 사람이 바로 함께 부름 받은 내 가족임을 알고 그와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온전히 주님께 드려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