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아프가니스탄 현지 테러 단체의 소행으로 보이는 자살폭탄 테러로 인해 윤장호병장이 숨진 일을 우리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효심이 깊고 공부도 잘하는 수재였을 뿐만 아니라 매주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 활동을 했으며, 교회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신앙심이 깊은 청년이었고 미국 남침례회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신학생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청년을 데려가셨는지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미움과 다툼과 전쟁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청년의 죽음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아이가 우리 아이라면 어떠할까라고 생각해 보니 더욱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 사람의 죽음은 가슴이 저며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아이의 출생은 너무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맏아들일 때 말입니다. 창29:31~3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 받지 못하다’는 말은 원어로 ‘미움 받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미움 받았습니다. 공동번역은 차별대우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아픔,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레아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태를 열어 주시어 맏아들을 낳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속에 있는 인간, 환난과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난 중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레아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감격,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는 “보라 아들이다”라고 야곱과 라헬을 향하여,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쁨의 환성이 그 아들의 이름이 되어 르우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르우벤이란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부모 여러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러분들도 자식을 낳고 이렇게 기뻐했었을 것입니다. 아들이던 딸이던 상관없이 첫 번째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이 세상에서 잘 자라주기를, 그리고 특히 신앙인들은 이 아이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듬뿍 받으며 자라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합니다.(시127:3)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 귀한 자식을 믿음으로 잘 양육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르우벤은 야곱에게 장자요 능력이요 기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장자로서 그 위엄과 위품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장자 권을 다른 형제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세기 35:22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빌하는 라헬의 몸종이요 단과 납달리의 모친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빌하를 범한 것입니다. 여러분 빌하가 비록 몸종이었을지라도 르우벤에게는 어머니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저질렀으니 야곱이 이 일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서운하고 괘씸했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그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그것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가 그 마음을 임종 시 자식들을 축복할 때 쏟아내었습니다. 그 내용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맏아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라, 너무 우쭐하고 세차구나.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 걷잡을 수 없는 홍수 같아, 끝내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 제 아비의 침상에 기어들어 그 소실마저 범한 녀석!”
그렇습니다. 르우벤은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탁월하지 못하고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루우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것도 당시 루우벤의 나이가 70여살 되었을 때이고 11명의 동생들 앞에서 말입니다. 너무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고 그야말로 후회와 통한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다윗은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 (시32:3~4)
여러분 야곱의 예언대로 르우벤은 맏아들의 권리를 요셉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역대상 5:1~2절이 잘 말씀해 줍니다. 그래서 벤돌 사무엘이라는 분은 야곱의 축복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나의 장자요 나의 기력이요 나의 슬픔의 시작이로다. 내 아들 르우벤아 너는 다른 형제보다 먼저 제사장의 축복, 장자의 축복, 나라의 축복, 이 세 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죄를 범함으로 장자의 복은 요셉에게 나라는 유다에게 그리고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 돌아 가는 도다.”
여러분 그 후 르우벤 지파는 점점 약해 갔고 르우벤 지파에서는 국가적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을 낳고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던 레아가 만일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겠습니까? 그렇게 귀한 아들, 그렇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과 그 지파가 그렇게 엉망이 되었을 때 얼마나 괴로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죄는 분명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자신을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부모를 이웃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1절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이라고 말씀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르우벤의 예를 통해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의 일입니다. 루이 16세와 왕비가 시민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흥분한 군중들은 “이제 왕자도 끌어내라, 죽여야 한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어린 왕자는 여섯 살밖에 안 된 꼬마였습니다. 군중들은 “왕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제안했습니다. “왕자를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왕자를 천국에 보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차라리 왕자를 더러운 뒷골목 늙은 마녀에게 주어 더러운 말과 행동을 배우게 합시다. 그러면 왕자가 죽어서도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래서 왕자는 뒷골목의 악녀에게 넘겨졌고 그녀는 왕자에게 더러운 말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어린 왕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어요. 그따위 더러운 말은 할 수 없어요.”
왕자의 신분에 어긋나는, 왕가의 법도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말이나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여섯 살 어린 왕자의 당당한 자세를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빌리 썬데이(Billy Sunday) 목사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나는 죄와 싸우겠다. 발이 있는 한 죄를 차버리겠고, 주먹이 있는 한 죄를 쳐버리겠고, 머리를 갖고 있는 한 그것을 받아버리겠고, 이빨이 있는 한 죄를 물어뜯겠다. 내가 늙어서 주먹도 발도 이빨도 힘이 없어지면, 영광의 내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 잇몸으로라도 죄를 짓이겨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후 500여년이 지난 모세는 약해가는 르우벤 지파를 위해 이렇게 축복기도 하였습니다.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 살기를 원하며 에서 살다는 말은 '생명을 가지다, 살아있다,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다, 소생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 르우벤은 그의 장자의 지위를 잃었으나 은총을 베푸시어 그의 생명은 잃지 않게 하시며 그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악한 죄로 축복권을 가진 야곱의 원한을 샀지만 한 부족으로서 그 존재를 잃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분명 르우벤은 율법적으로 보면 죽어야 할 존재이지만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살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는 것, 망할 자가 생명의 은총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르우벤을 통하여 죄의 심각함을 알려 주셨지만 동시에 그 죄를 넘어 살게 되는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아모스 5: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러분 인간의 가장 큰 범죄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가 잊어버려라. 하나님을 믿지 말라. 너같이 위대한 사람이 하나님 믿는 연약한 자가 되지 말라.”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7~8)
여러분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나무는 땅을 떠나서 살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과 가정, 사회, 세상은 저주로 인한 사건 사고로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3:16)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동받은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은 사는 역사, 생명의 역사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10: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을 살려 주시기 위해,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셨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눅4:18~19)
그리고 찬송 135장처럼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엠마오로 행하시던 주님 오늘도 한결 같이 우리 곁에 함께 계시고 우리들을 영접하러 다시 오실 때 변함없는 영광의 주 친히 뵈올 것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7~8)
여러분 시2:7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3:16~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보라 내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아 인간들이 내 아들 예수를 보라. 그러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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