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인물 중에 고난을 당한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는 욥과 요셉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극심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습니다.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모든 고난과 아비의 온 집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갔는데 그런 자신을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 죽이려 하고 또 노예로 팔려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애걸복걸하는 소리를 형들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가 노예로 팔려 고생할 때마다 형들에 대해 얼마나 원망과 한스러움이 북받쳐 올랐겠습니까? 이때가 한창 예민한 때인 17세 때였습니다. 또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겼는데도 결국은 종신감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배반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감옥에서 고생할 때마다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운 보디발의 처와 자기 처의 말만 듣고 감옥에 넣어버린 보디발을 생각할 때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왜 관원장은 요셉과 철석같이 약속하고는 감옥에 나가서는 요셉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을까요?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요셉에게서는 그야 말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원수를 갚고 손을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은 그러한 것을 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자신에게 그 고통스러운 아픔과 상처를 준 이들이었지만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밉고 야속한 사람들이었지만 용납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요셉이 여전히 미움 가운데, 증오심 가운데 그리고 그 상처 가운데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과거에 얽매어 있거나 한을 품고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 한과 상처가 자기 자신을 괴롭혀서 역사적은 과업을 수행하기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망가진 인생, 저주스러운 인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에 아직도 누군가를 향해 미운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또는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은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전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행한 과거,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고 지장이 되는 과거를 잊어버리라 하십니다. 아니 그럴 힘을 주십니다. 그 아픈 심령, 쓰라린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과거에 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조차도 미워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만들고 보기 싫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므낫세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분명 문제 많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을 내어 쫒은 교회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그 교회에서 나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나가십니까? 그러나 그 교회가, 그 교회 사람들이 사랑의 예수님, 은혜의 예수님을 내어 쫒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며 교제를 나누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못된 교회인데,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주님은 그 교회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위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저들의 예배를 받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복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품기를 소원합니다.
에브라임 -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그런데 이렇게 고백한 요셉에게 하나님은 이어서 둘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바로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창성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요셉은 매우 창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애굽의 2인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는 고백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자신이 형통하고 창성하게 된 것이 내 머리가 좋아서, 내가 훌륭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브라임이라 이름 지은 것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요셉의 감사와 찬양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며 사십니까? 얼마나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여러분 요셉은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기쁘게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을 한 요셉에게 하나님은 그 후 어떠한 복을 주셨습니까? 그는 이미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복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꼭 필요한 복이 있었으니그것은 바로 그 후손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후손에게 진정 에브라임의 복 즉 창성케 하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8절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병문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오른손 앞에는 므낫세를 왼손 앞에는 에브라임을 앉혔습니다. 그리고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시켰습니다. 이 때 야곱은 늙어서 앞을 못 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손을 잡아 머리에 각각 얹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긋맞겨서 오른 손을 차자 에브라임 머리에 왼손을 장자 므낫세 머리위에 얹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마음이 편치 못해서 “아버지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오른 손을 그 머리에 얹으소서” 하면서 아버지 팔을 바꾸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알아.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에브라임을 더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인정으로 그리 말한 것이었지만 야곱은 영감을 받은 대로 그리 축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수축복, 영감의 축복대로 므낫세도 한 족속이 되었고 에브라임도 한족속이 되었습니다. 두 아들은 각각 지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에브라임은 더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바로 요셉과 그 후손이 받은 복입니다.
그런데 그 후 4,500년이 지난 뒤 모세는 요셉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이렇게 축복했는데 그 축복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 축복은 두 지파가 차지하게 되는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1)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2)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3)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4)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땅은 요단 서편의 아주 기름진 땅들이었습니다.(수 16:1-17:18) 특히 그들이 기업으로 할당받은 땅은 가나안 전 영토의 1/4에 해당할 정도로 광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복을 받아 농경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이 넘치게 될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이슬과 물이 얼마나 소중한 지 보물 즉 매우 '가치 있는 것'(the precious things)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 후손들은 쓸데없는 것이 아닌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복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태양열과 달빛에 의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각종 땅의 소산물이 넘치고 옛날부터 에브라임 산지에서 생산되던 밀과 포도를 충만하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요셉지파가 받을 복은 다른 지파들보다 특별히 구별되게 뛰어날 것이며 첫 수송아지와 같이 위엄을 지닌 장자(長子)의 복을 받을 것이고 들소의 뿔처럼 그 힘이 매우 강해서 겁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스런 지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사사 드보라, 기드온 등 그 기세를 이방에 떨친 뿔 달린 들소 같은 용사들이 바로 요셉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이 때 모세도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라고 하여 에브라임을 더 높였습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에브라임은 에봇의 12보석 중에 셋째 줄 첫 보석 호박에 그 이름이 새기어 졌습니다. 호박은 색깔 내기가 아주 어렵고 깎기가 힘든 그런 보석으로 다듬어 놓으면 황금색 광채가 나는 보석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셉이 겪은 고난의 시절이 채색하기가 어렵고 깎기가 어려웠으며 광이 잘 나지 않는 호박의 원석에 비유가 된다면 30세 이후의 요셉의 화려한 일생은 그 보석을 잘 깎아 놓아 황금색 광채가 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젊은 시절의 고난과 좌절과 고통의 날이 훗날에 가서 인격과 업적을 빛내는 호박과 같은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작가인 존 러스킨은 “나쁜 날씨란 없으며 단지 종류가 다른 날씨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름이 잔뜩 낀 날씨나, 비가 오는 날씨를 두고“날씨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러스킨의 말대로 나쁜 날씨가 아닙니다. 특성이 다를 뿐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비가 오는 날씨도, 바람 부는 날씨도 다 의미가 있고 특성이 있습니다.
어느 날 러스킨에게 한 부인이 다가가“아끼는 손수건인데 잉크가 묻어 쓸모없게 되었다”며 하소연했습니다. 그 때 미술에 조예가 있었던 러스킨은 잉크 자국을 이용해 손수건 주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쓸모없다던 손수건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변했습니다.
나쁜 날씨가 아니라 다양한 날씨라고 생각하면 인생이 새로워진다.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복 받는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면 은총의 길이 열립니다. 악조건이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 인생의 보석이 있습니다. 한의학에서 우황청심환을 명약으로 꼽는데, 우황(牛黃)은 소의 쓸개 속에서 병적으로 뭉쳐진 물질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 명약을 만든 것입니다. 바로 고통, 고난 속에서 우리가 잘 아는 총리 요셉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므낫세는 셋째 줄 두 번째 보석 백마노에 그 이름이 새기어졌습니다. 백마노의 특징은 녹이 나지 않아서 오래 둘수록 좋은 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곳에 갔다 놓아도 녹슬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백마노는 잘라서 갈고 다듬을수록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입니다. 므낫세는 처음에는 억울했을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의 복을 주어야 했으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어떤 자격지심이나 원망을 품지 않고 그냥 자기 몫의 축복에서 꾸준히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조금도 녹슬지 않게 하고 무던히 꾸준히 노력하여 가장 크고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므낫세는 빛나는 백마노처럼 아름다운 보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로 한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후손에게 주신 복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잊고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므낫세라 고백하고 자신의 성공에 우쭐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요셉에게 하나님은 진정 그 후손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복을 주셨습니다. 고난을 잊게 하시고 창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하면 므낫세 에브라임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므낫세 에브라임을 합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요셉이 고난을 당했지만 주님의 고난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노예가 되는 고생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신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수의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고 또한 부활하신 뒤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 뜨거운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얼마나 창성케 된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도 므낫세의 믿음을 가져 과거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미국의 성공연구가 나폴레옹 힐이 500명의 성공자들을 연구하여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위대한 성공은 패배가 자기들을 엄습한 바로 그 지점에서 과거를 모두 잊고 미래만 보고 새 출발한 것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잊어버린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러면 이렇게 고백한 사도바울은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우선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 앞에서 받은 상급이 얼마나 컸을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세계에서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합니까? 또한 그의 이름이 너무 좋아서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바로 지금 이 시간 과거의 모든 쓰라림을, 과거의 모든 아픔을, 과거의 모든 분노를, 과거의 모든 상처를 므낫세 할 수 있는 복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여러분을 성숙시켜서 진정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되어지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브라임의 복, 창성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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