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언약의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 운영자 2007-12-31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97

http://gsnn.onmam.com/bbs/bbsView/34/441895

설교자 박승남 목사 설교일 2007년 4월 2일
마태복음 26장 26~ 29절

언약의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


우리 몸에는 혈관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그 혈관의 길이를 한 줄로 이으면 9,500Km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를 열 번 이상이나 왕복하고도 남는 긴 혈관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사방으로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관에는 끊임없이 묵은 피와 새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매초 1500만개 이상의 세포가 새로 태어났다가 죽고 태어났다가 죽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루신 신비한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피를 굉장히 많이 이야기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을 보면 피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피라는 말이 피, 피, 피, 피 하고 나옵니다. 성경에 얼마나 나오는지 어떤 분이 세어보았는데 418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레위기에 80번 이상 피 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피를 중히 여깁니다.


결국 예수 믿는 것과 피하고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굉장히 기본적인 공식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피는 곧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공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피를 흘림은 곧 죽음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피 흘리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죄의 삯이 사망이다’이라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것이 죽음이다. 죄의 삯이 죽음이다.’ 그러면‘죄의 삯은 곧 피 흘리는 것이다.’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고 싶은가? 피를 흘려라!”너 죄에 대한 대가를 정확하게 지불하고 싶으냐? 누군가 죽어야 된다 말입니다. ‘내가 죽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하니까 “아무개야 너 죄인이지?” “예. 죄인입니다.” “그러면 너는 죽어야 돼. 네가 죽기 싫으면 누군가 네 대신 죽어야 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을 대신해 대리로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짐승을 허락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시고 죽을 죄인도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정한 짐승이라야 가능했습니다.


  주로 소 양, 염소, 주로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소와 같이 비싼 것 끌고 와서 죽일 수 없으면 비둘기 같은 것, 그것도 없으면 고운 가루를 가지고 오도록 했습니다. 짐승일 경우 흠이 없어야 합니다. 눈이 빠졌다든지, 다리가 절룩절룩한다든지, 그 다음에 또 버짐이 나가지고 시커멓게 되었다든지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레위기 17:11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레 17: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씻어준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피를 짐승의 피로 대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피가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다는 기록을 안했지만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사람이 죄를 하루에 몇 번 범합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답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왜냐? 셀 수가 없으니까. 행동으로 범하는 죄야 몇 가지 말하라면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생각으로 범하는 죄, 마음으로 범하는 죄야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약시대의 백성들이 죄를 범한 대로 양을 끌고, 짐승을 끌고 왔다면 그 제사가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제사였겠어요. 그래서 구약시대 제사 지내는 장면은 피를 보는 장면입니다. 제사장들의 몸에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가지고 묻어 있지요. 제사 지내는 곳에 가면 죽어 가는 짐승들의 소리가 요란하지요. 여기저기 피비린내 냄새나지요. 기름 타는 냄새나지요. 참으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곳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가 그만큼 많고 더럽고 지독했다는 것을 말하는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다가 죽여도 그 짐승의 피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짐승의 피는 죄 지을 때마다 잡아야 하니까 일회용 반창고와 비슷해요. 매번 죄지을 때마다 끌고 가야 하니까 세상에 할 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아무리 짐승을 잡아도 죄짓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한번 짐승을 잡아서 바쳤으면 그 짐승이 애처로워서도 마음에 죄를 지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짐승 잡아서 제사해 놓고 와서 죄용서 받았다고 똑같은 짓을 하니까 마음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은 죄를 범하고 겉으로는 제사지내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서“너희 마음으로는 죄짓고 겉으로는 와서 제사만 지내는구나. 그 제사 안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피는 아무리 많이 흘려는 죄에서 우리를 완전히 구출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방법을 강구하셨습니다. 매번 죄지을 때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단 한번 피 흘리고 죽어 그것으로 해서 수백 년 수천 년 죄를 범해도 그 죄를 다 용서받게 할 수 있는, 죄를 씻을 수 있는 그런 방법 말입니다. 그 다음에 단순히 죄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마음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피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죄가 없는 자의 피라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피는 너무나 고귀한 피라 우리는 그 피를 구하려야 구할 수 없고 이 세상 어디를 헤매고 다녀도 그 피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 피를 마련하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귀한 피를 갖고 계신 분으로 그 귀한 피를 흘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조건 여러 가지가 완전히 충족되는 분입니다.


  드디어 우리 예수님은 저나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노예들 아니면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사람대접하는 사람은 절대로 로마 제국에서 가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근지근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형선고를 내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어는 분이 그 고통을 의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를 쓰러뜨려 그의 등과 팔이 그 나무에 닿도록 했다. 군단의 한 병사는 예수의 손목 앞쪽에 움푹한 부분을 만들었다. 그는 단철로 된 4각형의 무거운 못을 그의 손목에 박기 시작하여 나무 깊숙이 박았다. 재빨리 그는 반대편으로 가서 또 다른 못을 박았는데, 그는 예수의 양팔을 최대한으로 벌리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몸이 헐겁게 매달려 움일 수 있도록 양손의 간격을 좁혀서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줄기같이 생긴 지주’ 즉 수직 들보 위의 적당한 곳에 그 형틀을 세웠다.


병사는 그의 오니 발을 오른 발 뒤로 밀어붙이고는 발가락이 아래로 가도록 두 발을 편 후 무릎이 약간 처지도록 양발의 장심에 못을 박았다. 이제 예수는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그가 천천히 아래로 축 처질 때 양손의 못에는 더 많은 무게가 걸리게 되었는데 그 때 손목들의 못은 정중 신경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 손가락에서 시작되어 양팔로 타고 올라와 그의 뇌 속에서 진통하였다. 이렇게 뻗어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가 몸을 위로 밀게 되면 그의 온 무게는 그의 발에 박힌 못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발의 못 때문에 양발의 척골 사이의 신경들은 마비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양팔에 힘이 빠짐에 따라 근육에는 큰 경련의 물결이 일어났기 때문에 근육은 쉴 새 없이 진동하며 깊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런 경련들 때문에 그는 자기의 몸을 위로 밀어 올릴 수 없었는데…….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것을 내쉴 수는 없었다. 예수는 적은 양의 숨을 단 한 번이라도 내쉬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위로 올리려고 애썼다. 결국 이산화탄소가 폐와 혈류에 쌓였고 경련은 부분적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동안이나 그는 몸을 위로 올려 숨을 내쉴 수 있었으며 생명을 살려주는 산소를 겨우 들여 마실 수 있었다.


 뒤틀리며 관절을 찢는 주기적인 경련들,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질식 상태, 그리고 거친 십자가 나무에 등이 닿아 있기 때문에 아래위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찢겨진 등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오면서 일으키는 얼얼할 정도의 고통-이런 끝없는 고통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심포(心包)가 혈청으로 천천히 차서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이제 모든 고통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세포 조직의 분비액은 치명적이리만큼 흘러 나왔으며, 압박을 받는 심장은 진하고 무거운 피를 세포 조직 속으로 펌프질해 내느라고 애썼으나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통에 짓눌린 폐는 조금의 공기라도 호흡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제 예수의 몸은 극한 상태에 도달했으며, 그는 죽음이 차갑게 그의 세포 조직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속죄 사명은 완성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죽음에 넘겨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는“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아주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이토록 처절한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날 밤 예수님이 빵을 가지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그리고 잔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언약의 피니라.” 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예수야, 네가 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준다면 네가 흘리는 피를 두고 내가 약속하마. 네 피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마.”“네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를 보고 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마. 네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네 피를 보고 모든 사람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주마.” 하나님이 예수님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바로 우리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십자가를 붙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죄를 놓고 무조건, 영원히, 완전히 용서해 버립니다. 믿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뜻도 있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므로 그 피를 발라놓은 문설주 뒤에만 숨으면 아무리 죽음의 천사가 무섭게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밤이라도 안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피를 바르고 십자가 뒤에만 숨으면 천하가 흔들려도 걱정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끌고 갈 사람도 없고 우리를 지옥에 던질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들먹이며 우리를 괴롭힐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뒤에만 숨으면 안전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까지 아무 탈 없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혈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내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시험을 이기는 승리가 됩니다.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합니다. 날마다 나에게 찬송을 줍니다. 이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용서함을 받아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죄값으로 죽을 일이 없게 도비니다.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 죽는 것을 죄 값으로 죽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한 죽음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 범브란트 목사님의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옛날에 두 형제가 살았는데 형은 참 착한 아들인데 동생은 좀 난폭했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애야, 너 그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바로 살자” 했지만 동생은 형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점점 더 악해졌습니다.


  어느 날 밤에 후닥닥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납니다. 형이 놀라서 보니까 옷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는 눈이 뒤집혀 동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동생이 형을 붙잡고는 “형님, 나를 좀 살려주세요.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데 경찰관이 나를 지금 따라오고 있어요. 나를 좀 숨겨 주세요. 나 이러다가는 큰일 나요. 형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때 형님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야, 옷 좀 바꿔 입자.” 그러니까 동생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피 묻은 옷을 훌렁 벗었습니다. 형은 자기 옷을 벗어 동생에게 입혔습니다. 피 묻은 옷을 형이 입었고 동생은 피했습니다. 경찰관이 달려왔습니다.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물으나 마나 끌고 갔습니다. 재판에 회부 되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되는 그날 마지막으로 간수가 찾아와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형이 조그마한 종이쪽 한 장을 간수에게 건네주며 이걸 꼭 내 동생에게 전해주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편지를 전해 받은 동생이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사람을 죽이느라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죽지만 너는 부디 내가 네게 준 흰옷을 입고 제발 착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먼저 죽는 형이 절대로 섭섭하지 않겠다.” 이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난 동생이 놀래 가지고 형님 살려야 한다고 형장으로 뛰어갔습니다만 형은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동생은 형이 입혀준 그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옛날에 함께 깡패 짓을 하며 살던 친구들이 찾아와서 “너 뭐 그렇게 쩨쩨하게 그러냐. 우리 한탕 하자” 말할 때마다 “아니야. 나는 내 형의 옷을 입고 있어. 나는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여러분, 여러분의 피 묻은 옷을 예수님이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이 믿음을 가지고 성찬식에 참여하며 날마다 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운영자 2007.12.31 0 652
다음글 므낫세하고 에브라임하니 에브라임의 복을 운영자 2007.12.31 0 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