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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운영자 200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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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승남 목사 설교일 2007년 4월 8일
요한복음 20장 11~ 29절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회색 옷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어라


슬픔의 옷을 벗고 향기로움을,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화환으로 장식하고,


슬픔에 젖어 무거운 발걸음 대신 생기 있게 날뛰어라.


마음을 한껏 열어 크나큰 기쁨을


이 부활절에 맞아들일지어다.




이 시에 나타난 대로 부활의 큰 기쁨이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 차고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옮겨질 것이라 가 아니라 믿는 즉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만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만약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죽어 보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죽음에서 살아나 영원히 사는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 죽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인간 역사 이래 오직 단 한번 일어난 일이 없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부활의 사건을 신비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빈 무덤입니다. 장정 몇 사람으로도 움직이기 힘든 무덤 돌, 밀쳐놓기도 힘든 그 돌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종이비행기를 던진 것처럼 멀리 던져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천사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고 말했다고 증거 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러나 분명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으로만 부활의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7절을 보면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수건은 예수님 머리에 쌌던 둥근 모양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그대로 빠져 나갔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부활의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빈 무덤 의미가 있고 천사의 나타남과 음성 그리고 수건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진정한, 절대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그분이 사람들을 만나준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대구지역 많은 불교계 사람들이 기독교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황태봉이라는 사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사람은 오래 전에 전기 배전공사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기공사를 하다가 감전되어 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에다가 시신을 놓고 가마니로 덮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이야기로 하면 누군가가 와서 자기를 만져 주는데 생명이 자기에게로 들어오고 그래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마니를 들추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습니다. 이분의 생각은 도대체 나를 살려준 사람이 누구냐? 이게 참 궁금했습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서 살려냈느냐?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려준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불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부처님이 살려 주셨나 하고 말입니다. 그는 절에 들어가 유명한 주지스님까지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알아주는 분, 다니면서 강의도 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이 화장실을 가는데 입에서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그런데 이 노래는 자기가 배워본 적도 없고 불러 본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에서 자꾸 나오니까 자기도 모르게 부르고 다녔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찬송가거든요. 그러니 중이 찬송가를 부르고 다녔으니 이게 무슨 창피예요. 그래서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불교신도들을 위해 강의를 하러 갔는데 중간에 자꾸만 예수 예수 예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황태봉이라는 사람이 이거 내가 귀신 들렸나보다 그래서 강의 끝나고 부처님 앞에 가서 열심히 빌었습니다. 귀신을 쫒아 내 주시고 제 정신 좀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럴수록 자기 입에서 계속 솟아나는 말이 예수 예수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니 그래 주지 스님이라는 놈이 찬송을 부르고 다니지 않나, 예수 예수 하지 않나  그래서 이 분이 절에서 나와 교회로 가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자기에게 손을 대어 주시고 자기를 살려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불교계를 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헛짓 말아라. 불교를 믿어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너희들 구원받지 못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을 만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로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만난 후에는 놀랍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장사 지낸 지 사흘 되던 날 이른 아침 주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부어드릴 마음으로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에 올라갔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로써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변하여 새 마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주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그 소망 중에서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독실한 신앙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소망이며 기쁨이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슬픔과 절망과 고독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아침 마리아는 무덤에서 주님을 찾아갔다가 예수님의 시신(屍身)마저 없어진 것을 알고 홀로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그의 등 뒤에서 조용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처음에 마리아는 그 목소리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지만 마리아야 하시는 음성을 듣고는 바로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랍오니(선생님)"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슬픔과 절망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의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지라도 그것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을 본 이야기와 주님의 부탁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슬퍼하는 자를 찾아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25: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망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나 기타 이런 저런 슬픔을 당한 이들을 찾아오시어 그 슬픔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주십니다. (진완이 할머니 고 김두기성도님)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 11:24-25


그리고 오늘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이들에게, 이런 저런 문제로 슬퍼하며 걱정하는 이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여러분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19세기의 욥'이라 불리는 호레이쇼 스파포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1873년 아내와 네 자녀를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타고 가던 배가 해상 충돌사고로 선체는 침몰되어 함께 가던 자녀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지나가던 항해사에 의하여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비보를 접한 남편은 밤새 울부짖다가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이러한 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평안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여러분 어떻게 이렇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소망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네 자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슬픔을 겪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 내 영혼 평안해 하고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은 일시적인 것이며,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우리가 맞는 부활절은 다시한번 우리 인간의 모든 슬픔을 털어 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므로 위로와 소망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기운을 잃고 용기를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절망과 수치를 느꼈으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침통하게 앉아 있는 지금, 그들은 ‘왜 그들은 그처럼 비겁했던가’하는 자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들 때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다짐했었건만 막상 일에 부딪치자 당황하여 경황없이 도망치지 않았나 베드로는 3번씩이나 모른다 하지 않았던가? 하나하나 생각해 볼수록 정말로 비겁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첫마디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수치와 죄책감을 다 떨쳐 버리고 내가 주는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주시어 저들의 비겁했던 행동들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비난이나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은 저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여 주신다는 말씀이요,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믿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러분 평안과 편안한 것은 다릅니다. 편안한 것은 세상 환경이 주는 것입니다. 좋은 의자에 앉으면, 좋은 집에서 살면, 좋은 차를 타면 편안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안은 주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요14:16~17)


그렇습니다. 주님은 실패와 좌절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인생들에게, 불안하고 걱정하는 인생들에게, 헛된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대신 이 땅에 인간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시어 평안을 전하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이 평안을 갖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 불안과 죄책감을 주님의 사랑으로 떨쳐버릴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를 만나 주셨습니다. 도마는 다른 열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그 후에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독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도마의 관심사는 그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이 과연 그들과 함께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던 그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하게 부르짖던 그 예수님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의심했던 그를 잘했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만일 부활하셨다는 그 분이 십자가 지신 그 분과는 전혀 다른  유령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평화를 이야기하고, 죄 사하는 권세를 주시는 주님, 부활하신 주님은 필연코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도마에게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가 주님을 사랑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도마가 진정 주님을 만나고픈 생각해서, 부활하셨다는 주님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분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했다면 그는 단순히 의심 많은 제자로서의 낙인찍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도마를 위해서 특별히 다시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한 대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시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에 혼자 생각한 것조차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여러분의 언행심사 모르시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십니다.


어쨌든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즉시 너무도 감격스러워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그 어느 제자보다도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귀한 고백이었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도마의 이 고백적인 대답은, 그가 갈보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가 완전히 같은 분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바로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까지 받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기 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그 분이 승리하셨습니다. 바로 그 분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못자국난 자신의 손과 창자국난 자신의 옆구리를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온갖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평안을 맞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종이시며, 동시에 영광 받으시는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천박한 것이며, 영광 없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흔적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고난 받고 어려운 이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전파하므로 새 힘과 용기와 믿음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소망을 주시고 새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을 주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얼굴을 들어 우리 곁에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마음의 문을 열어 그를 영접합시다. 그러면 우리 속에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용기가, 믿음이, 뜨거운 정열이 생길 것입니다. 이 희망과 용기와 믿음으로 오늘의 슬픔을 극복하며, 우리가 만난 역경들을 헤쳐 나가며,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을 널리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큰 희망과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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