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결혼해 살게 되었습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 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 했어] 였습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니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뿐입니다.
나 위주로만 생각하고 상대를 못 보니
그것은 최선이 최악을 낳고 만 것입니다.
오늘은 오순절 성경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이미 죽은 가룟 유다만 빼고는 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마음을 합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면“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합니다. 이는 같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꾸준히(constantly)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저들은 같은 마음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게 저들을 사랑하신 예수님과 한 마음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서로도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십자가를 지셨을 때 부인하고 도망치고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까요? 만일 제자들이 다시 모이지 않았다면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부활하신 주님은 무엇보다 제자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저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저들을 통해 위대한 비전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저들을 찾아가시어 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위대한 비전인 주님의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리고 이를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여서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저들을 한 마음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같은 마음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가의 다락방은 일치된 생각과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자리였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기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the spirit of oneness)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 된 마음, 한 마음 된 자리에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으로 무장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보다는 더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님의 공동체가 성령으로 무장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보면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데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영광,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데 관심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도 오순절 날과 같은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에스겔 37장은 아주 메마른 뼈들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까 큰 군대가 된 것을 보여 줍니다. 이는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다(겔37:11)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환상으로 하나님은 무덤을 열고 이스라엘을 나오게 할 것이며 저들 속에 성령을 두시어 살아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얼마든지 역사하시어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우리 영혼에 성령의 단비를 보내시어 하나 됨의 역사,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서 각자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란 회오리바람이나 태풍과 같이 돌진해 오는 소리를 말합니다. 강한 힘을 동반하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은 가는 방향이 있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도 역사 하시는 방향과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여 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런데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인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 성령께서 목적이나 방향이 없이 움직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을 분명 바람처럼 임의로 움직이시지만 분명한 방향을 갖고 움직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교회를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강하게 움직여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방향으로 우리 교회를,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두 가지 방향으로 우리 교회를 이끄시기 원합니다. 하나는 지리적 방향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곳 모전동, 점촌이 바로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사는 영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울러 온 유대인 우리나라와 사마리아인 북한과 땅 끝인 세계열방에도 관심을 갖고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질적 방향으로 성령님은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교회로 만드시기 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말씀과 기도라는 두 날개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대그룹 축제예배와 전인적인 소그룹이라는 두 날개입니다.
1) 대그룹 축제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배웁니다.
2) 그리고 전인적인 소그룹을 통하여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소그룹에 모여 성도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언제든지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나님, 통회하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시고 외롭고 어렵고 힘들고 슬픈 이들을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적인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먼저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은 거기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입기를 원합니다.
불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강력한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움직여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역동적인 힘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은 교회를 창조하시는 분이시요. 교회로 하여금 교회답게 일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힘과 능력을 주시어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고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한 저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놀랍게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각 나라의 말(방언)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하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 소리를 자기들의 말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듣던 이들은 모두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저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도 있으셨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순종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밀알은 또 다른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땅에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도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신 것처럼 그 큰 사랑을 친히 보여 주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은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5: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도 예수님 태어나기 700년 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도다.” (사53:4~5, 7,12)
누가 과연 우리를 위해 이렇게 희생당하겠습니까? 누가 과연 우리를 위해 죽어주겠습니까?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죽으신 것으로 끝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는 외칩니다. 다윗은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비참하고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죽음은 사망의 권세, 죽음의 사슬을 깨뜨리신 죽음입니다.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능력되신 분이 어떻게 사명에 매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5,57)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강림으로 주님 말씀하신 주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탄생된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가족공동체였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대그룹 날개로 성전에 모이기에 힘썼고 소그룹 날개로 집에서 떡을 데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充滿)하다(be filled with)”는 말은 그 속이 완전히 성령으로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저들은 온전히 주장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마음껏 저들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각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속에 성령께서 계시는 것 하고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한 것 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문제는 그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고 내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적으로(active)하게 일을 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계산, 인간적인 판단 이런 것들을 의지하고 사는 한 성령은 내 속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 때 성령은 내 속에서 거의 질식 상태에서 신음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성령은 active하게 일하실 수 없습니다.
우찌무라간조라는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기를 원하시나요? 그런데 여러분 저의 이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성령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은 어떻냐? 성령을 받겠느냐?" 이렇게 제자들의 의사를 정중하게 물어 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예." 아니면 "아니요." 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진정 성령의 충만을 입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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