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군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십 대씩 날아와 런던 시가지와 해안을 폭격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런던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식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그 꽃은 뉴질랜드 해안에 많이 피어있는 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꽃씨는 바람과 물결을 따라 영국에까지 날아와 땅 속에 깊이 파묻혔다가 폭격으로 흙이 뒤집혀 묻혀 있었던 꽃씨들이 싹이 나서 런던 거리와 해안 근처에 꽃밭을 이룬 것입니다. 전쟁의 파괴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던 영국인들은 이 꽃이 피어남을 보고 전쟁의 파괴 속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 재건에 힘써 오늘의 영국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생명은 신비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하나님은 성막을 짓는 일에 대하여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명의 속전"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생명의 속전이란 자신의 생명을 위한 속죄금이란 뜻입니다. 즉 “죽을 목숨 건지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을 얻은 대가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속전은 죄와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생명의 속전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은 ‘죄를 속한다’, ‘죄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히브리 낱말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 하심으로
1. 인간은 모두가 죄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각자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권력도 돈도 명예도 건강도 다 갖추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것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금 사는 모습이 어떠하든지 인간이 현재 입고 있는 옷가지 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 던지고 나서 그 인생에게 남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찰스 스윈돌 이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한 번 주일날 설교를 하다가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끝나고 예배 끝나고 이 목사님이 운전을 하면서 집에 가다가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빨간불인데도 그냥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감이 이상해서 보니 자기가 빨간불을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누가 본 사람이 없는가 옆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아 교인들이로구나 우리 교인들이로구나 내가 설교 해놓고 내가 어기고 교인들에게 들킨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목사님인 이내 얼굴을 돌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얼른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까 어디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한 번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 만나고 싶습니다.' 아이고 이거 큰 일 났어요. 교인들이 아마 따지자고 나를 만나자는 모양이다. 그냥 점심 같이 해요? 목사님. 그렇지만 아이 이거 설교한 것 실천하지 않았다고 단단히 나를 아마 따질 모양이다. 한참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다가 그러자고 만나자고. 그 이튿날 점심시간에 약속된 자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굉장히 유머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딱 약속 장소에 목사님이 나타나는데 목에다 무얼 걸고 나왔어요. 무얼 써 갖고 나왔어요. 영어로 I am guilty!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쓰고 나오니까 얼마나 우스워요. 교인들이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하더래요. 딱 그 모습을 보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뒤를 딱 돌아섰어요. 뒤에도 무얼 걸고 있어요. 뒤에 보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치라.("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throw a stone at me.")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따라서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사망, 멸망이라는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더 나아가 이 속전은 우리의 생명은 값을 지불하고 사야만 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의 구속이 그냥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라고 하시는 속전은 반 세겔입니다. 세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게를 달 때 쓰던 단위인데 오늘로 치면 11.5g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세겔이 돈의 단위로도 쓰였는데 지금도 이스라엘의 돈의 기본단위를 세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 원, 백 원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서는 십 세겔, 백 세겔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돈 일원하고 이스라엘 일 세겔의 값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성소의 세겔로 쳐서 반 세겔이 얼마나 큰돈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가난한 사람들도 내야 하는 것이니 그리 큰돈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하고 값진 예수님의 생명이 지불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디도데전서 2:5~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대속물)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생명의 속전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잊지도 말고 소홀히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2:3절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작은 구원이 아니라 큰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홀히 여기면 쉽게 믿음을 팔아버립니다. 구원을 던져버립니다. 이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생기고, 문제에 직면하고 위협과 박해가 다가올 때 믿음을 내 던져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앞두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내가 믿음을 지켰다(딤후4:7)고 자랑스럽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이 믿음, 구원을 지키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3.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표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을 얻은 것을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며 오늘 우리들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했습니다.(롬 7:25)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런데 여러분 감사를 하되 말로만 하지 않고 물질로 하게 하셨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도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에 그 마음과 함께 드리도록 물질을 드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송이 있습니다. (505장 2절) 온 세상 위하여 이 복음 전하리 저 죄인 회개하고서 주 예수 믿으라 이 세상 구하려 주 돌아가신 것 나 증거하지 않으면 그 사랑 모르리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면 그 사랑을 깊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을 드리면 더욱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헌금을 드리는데 그 정신은 모두 감사와 믿음입니다. 십일조도 소득을 주시고 일하게 하신 하나님,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드릴 때 그 십일조를 주님 기쁘게 받으시고 더욱 삶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은 사업에 실패하면 먼저 십일조를 바쳤느냐고 묻고는 십일조를 바쳤다면 십의 이조를 바치라고 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이 사업에 일어나지 못한 분들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왜 목사님은 그런 권고를 했으며, 그 권고를 받아들인 분들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신앙은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께 드립니까?
4. 그런데 이 속전은 부자나 가난한 자를 구별함 없이 모두가 반 세겔씩 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의 생명이나 가난한 자의 생명이나 다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만인 평등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가난한 자를 홀대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려 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하라 고 말씀하고 야고보서 2:1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돈 있고 힘 있는 자들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꼼짝 못하고 가난한 이들 앞에서는 큰 소리 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도와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교회에 오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소중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평등합니다. 비록 세 세상에서는 스타의 몸값과 무명의 몸값을 현저하게 구분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에 차등을 두시지 않고 동일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의 생명이나 나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다 귀히 여겨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인생 하나하나를 귀히 여기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이 속전은 오직 회막 봉사를 위하여서만 쓸 수 있었습니다. 생명 값은 성막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재물이 사용되는 보람과 기쁨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시기도 한 것입니다. 성막은 바로 그들의 생명을 모아 놓은 곳이요, 성막이 곧 그들의 생명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진정 성막은 바로 그들의 생명과 같이 중요한 곳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성막에 진정한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십니다. 성막에 그의 생명 값이 드려졌다는 것, 즉 생명의 가치를 지닌 이 귀한 물질이 성막에 드려졌다는 사실은 그의 온 마음이 여기 있어야 함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의 마음이 성막에 드려지지 못했을 때 성막은 황폐하게 변하고 예배가 잘 드려지지 않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살 길을 찾아 각자 가야 했던 비참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막은 예전 이스라엘에게만 주시는 교훈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막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후에 성전이 되고 성전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결국 오늘날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막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삶이란 예수 중심, 교회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삶과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교회에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회 안에 추한 면이 있어서 그래서 교회를 더욱 사랑한다.
병원에 가면 악취, 피, 고름, 신음 소리 등 구역질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불쾌한 상황 속에서 병든 자를 위해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을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병원의 아름다움이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죄인들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죄인들은 교회에 들어온 뒤에도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옷자락 속에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다. 사랑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교회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에 품어주고 치료해 주는 데 교회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주님은 용납하시고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심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며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며 용납해 주며 죄인들, 상처 난 영혼들을 가슴에 품어주며 함께 더불어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를 이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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