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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 운영자 200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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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승남 목사 설교일 2007년 8월 19일
출애굽기 33장 18~ 23절

하나님의 영광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이며, 그 아들 비느하스 제사장의 아내는 전쟁에 나간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해산 바로 직전입니다. 임산부들이 그렇잖아도 긴장이 되고 불안할테지만 이번의 전쟁은 뭔가 불안합니다. 블레셋에게 절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제사장과 법궤까지 동원했습니다. 제사장은 전쟁의 지휘관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입니다. 백성을 위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께 기도의 소원을 올리는 직분입니다. 제사장은 성전에 있어야 하고 성전에서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1세기 제사장이었던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 성전의 제사장들은 아비규환의 전투 상황 속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당일 제사의 업무를 중단 없이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피를 보아서도 안 되고 피 흘리는 일에 독려해서도 안 됩니다. 제사장은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됩니다. 시체는 죽음이고 죄악입니다. 그런데도 승리에 급급하여 제사장이 전쟁에 나가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 언약궤까지 앞세우고 나갔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전쟁터에나 내모는 부적 정도의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전쟁에서 블레셋이 크게 이겼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꼴은 어떻게 되며 하나님의 모양새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비느하스의 아내, 비록 여자의 입장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출산의 고통이 몰아칠 때 어린 아이를 낳으며 그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명명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영광이 떠나갔다"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영광은 이스라엘의 용맹스러움이며 위신이며, 생명의 힘이요,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 자신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권능도 생명의 능력도 얻지 못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한없이 비굴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어둠의 세력들이 이스라엘을 장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린당하고 원수들은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아들이 살아갈 다음 세대를 염려하며 비통한 심정으로 "이가봇"을 외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홉니와 비느하스의 시대와 같지는 않습니까? 블레셋과 같이 죄악과 불신과 어둠의 세력에 의해 짓밟혀지고 조롱당하는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명의 능력을 잃고 자녀의 권세를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것은 어쩌면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찾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고 장사하고 사업하고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얼마 전 이용훈 대법관이 탈세의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세인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든 건 탈세의혹 자체보다도, ‘신앙인이 어떻게 돈을 관리했는지 믿어 달라’라고 말함으로 신앙을 근거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그의 중심이 어떠한지 주님은 아시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변명하는 자리에 왜 신앙이, 예수님이 이용돼야 하는지 오히려 그분께 누가 될까봐 말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는지 아쉬운 마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진정 이 일 외에도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이 이용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은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실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우상 숭배의 모습을 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그의 형 아론이 보여준 태도입니다. 설령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자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는 지도자이며 모세의 형입니다. 당연히 모세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사로운 감정을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야합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40일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어리석은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우상을 제조했고 급기야 백성들과 함께 열광적으로 그것을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넘겨주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잠시 동안 이었지만 이가봇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이것을 본 모세는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자 하나님은 친히 가시겠다고 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까지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새 힘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들어나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새롭게 깨닫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며 살아가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 간청했습니다.(18절)


그런데 이러한 모세의 요구에 대하여 하나님은 단지 등만 보여 주심으로 그 영광의 잔영만을 보여 주시었습니다(23절).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계성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감히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의 눈은 타버렸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속에 숨겨져 있는 죄악 속에서 평생 벗어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폐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만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은혜스러우신 조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후광의 일부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으로 심히 만족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고 하나님을 모시는 스랍천사들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직접 뵐 수 없어서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사6:1-5)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나타났을 때, 곧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겔1:26-28). 다니엘은 성자 하나님이 그를 찾아 주셨을 때 "그 몸에 힘이 다 빠졌고 그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습니다. (단10:5~8)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권능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외쳤고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은 아예 그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물론 3일 뒤에 주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도 비록 그가 주님의 사랑받고 그 품에 안겼던 제자였지만 영광의 주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계1:17) 되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모두들 자기 시대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을 때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저들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결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새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더욱 주님께 겸손하기 위해서 입니다. 더욱 주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는 이 세대에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총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을 아십니까? 그리고 얼마나 주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십니까? 사도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고전10:31)


최후의 만찬의 명화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리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다른 그림은 다 그렸는데 예수님의 모습과 가룟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다빈치의 제자 사라이가 “선생님, 그리스도의 모습과 유다의 얼굴은 언제 그리실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대하여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군!”


다빈치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쥐고 고민하였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가룟유다의 모습만 빼고 그 외의 모든 그림은 p다 완성되었습니다.


다빈치의 제자 사라이는 감탄하였습니다. “이 그림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명화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림을 구경하러 몰려와서는 많은 이들 감탄하였습니다.


그 때 다빈치는 소리쳤습니다.


“아직 그림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모두들 나가주십시오.”


그런데 다빈치 곁에 섰던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참 잘 그린 그림이야, 저 중에 어디에 자네는 눈길이 많이 가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글쎄, 모든 그림이 다 눈을 끌기 때문에 특별히 눈이 머문 곳은 없는 걸”


“아니야 자세히 보라고. 저 식탁 위의 은잔들이 얼마나 생생한가 말이야, 나는 단 번에 눈이 저 은잔에 끌리는 걸, 참말로 잘 그렸어. 실물 그대로야.” “응……. 그렇군.”


다빈치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중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의 기도의 골방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얼굴이 사람들의 눈을 끌어야 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저에게 보여 주옵소서! 제가 주님을 보기 원함은 저 자신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몇 날을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을 잊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감고 있는 다빈치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강한 빛줄기 속에 영광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환한 얼굴, 인자하신 그 모습의 뒤엔 환한 빛이 햇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달무리 같은 후광. “주님, 감사합니다.”  다빈치는 뛰어 나와 화필을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그림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모든 일을 할 때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바라며 열심을 다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선한 것으로 모세 앞으로 지나시겠다는 것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모세 앞에 선포하겠다 하시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은 어떠합니까?


물론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는 모세가 이미 시내산에서 경험한 바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여러분 은혜는 히브리 말로 ‘하난’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은혜(자비)로우시다' 라는 뜻의 요하난이라는 남자 이름이 나왔습니다. 또한 은혜, 은총이라는 뜻의 '한나'라는 여자 이름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이름 중 '죤'(John), '요한'(Johann), '쟝'(Jean), '얀'(Jan), '후안'(Jaan) 등은 '요하난'으로부터, '앤', 안나(Anna), '낸시'(Nancy)등은 '한나'로부터 파생된 이름입니다.


어쨌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나로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영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 간에 강건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귀여워하다', '사랑하다'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이사야는 젖먹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고(사49:15), 시편 기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습니다(시 103:13).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어 아버지의 사랑으로,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진정 우리가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남의 죄를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보며 불평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서 교회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불평꾼이 되고 훼방꾼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사람들의 모임이 되고 사람들이야 한두 번 만나면 벌써 다 드러납니다. 서로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하고 흉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다 떠나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며 웃습니다.  우리 스스로 여호와의 영광을 떠나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는 이가봇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가고 교회조차 세속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할 때 우리는 더욱 여호와의 영광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우리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겸손히 주님을, 세상을 섬겨야 할 때입니다. 진정 우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만성적인 불평불만 자가 되어버릴 것이


고 세상에 조롱받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엎드릴 때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지는 성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내부가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듯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밑바닥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내 밑바닥이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의 후광이라도 보게 하실 때에 모세를 어디에 세우고 보게 하셨습니까? 바로 바로 반석 틈입니다. 하나님은 반석 틈에 모세를 두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도록 손으로 덮으셨다가 손을 거두시어 하나님을 뒷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 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8~9)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뵙지 못했지만 믿음눈, 영의 눈으로 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예배하는 성도들 가운데 임재 하시어 그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뵈올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직접 뵈오며 주님의 영광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할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을 보며 기뻐하며 찬양하게 되는 그 날 여기 앉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제외됨이 없이 참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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