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은 믿어야 할 때(사7:1~16) | 박승남 | 2008-12-20 | |||
|
|||||
|
한 주간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까? 주님께 드릴 빈 방은 준비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 당시 앗수르란 나라가 신흥 국가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주변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이를 대비하여 수리아는 북쪽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고, 나아가서는 남쪽 유다까지 동맹에 가맹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로부터 거절을 받자, 그들은 주전 734년에 예루살렘을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16:5). 수리아와 이스라엘의 동맹군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들리자, 가장 두려워하며 떨었던 사람은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였습니다. 그는 불어 닥치는 폭풍 앞에서 나무 가지가 흔들리듯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성들도 불안에 떤 것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6:2). 문제는 얼마나 버티느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하스 왕은 가장 먼저 물을 확보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천연요새로 되어 있어서 물과 음식만 준비된다면 오래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하스는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물 저장하는 곳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냈습니다. 이사야는 특별히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물을 확보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타다만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그런데도 아하스는 자기의 계획만 의지할 뿐이지, 도무지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7:9) 하나님께서 저수지에서 물 저장을 독려하고 있는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보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하스 왕은 물을 많이 비축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네가 저수지를 준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물을 주고 보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나 하나님이다”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돈만 준비하면 되는 게 아니라 물질과 물질을 벌 수 있는 건강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가 아들을 데리고 간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들 이름이 스알야숩입니다. 그 말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는 뜻인 데, 아하스도 이전부터 그 아이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이 아이와 함께 보낸 이유는 아하스 네가 죽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왕, 너에게 달려 있다고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이 예언자의 말을 신뢰한다면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망하고 말리라.’ “조심하라. 침착해라. 안심하라. 겁내지 말라.” 네가 최선을 다하지만, 두 나라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와 같은 것들이니 두려워 말고, 안심하라.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굳건히 서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못하면 서지 못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주 비슷한말이어서 매우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믿지 못하면-테아미이누, 서지 못 한다-테아메에누.” 두 단어의 뿌리는 아멘이란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멘이란 단어는 본래 “세우다, 지탱하다”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것은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반드시 선다, 지탱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신앙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오직 한가지 믿음에 굳게 서는 것 뿐입니다. ‘신앙으로 굳게 선다’는 말은 감정적으로 다짐하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은 말씀과 관련이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말씀을 주시고, 굳게 서라고 하십니다. 아하스에게도 이사야를 통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먼저 주셨습니다. 아하스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두 나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결국 망할 것이니 이 말을 의지하고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아주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나(ego)란 인간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나는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서 있으면 잘못될 수도 없고, 결코 넘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넘어진다는 것은 내가 붙들고 있는 주님이 넘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넘어질 수 있습니까? 주님이 넘어질 수 없다면 나도 넘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선다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아하스 왕은 그 말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또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0).” 그런데도 아하스는 징조도 구하지 않겠다고 버티었습니다. 그가 거절하는 이유가 근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언뜻 생각하면 매우 신앙적인 표현 같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파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습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3절) “다윗 왕실이여 들으십시오.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한 것입니다. 아하스는 굳게 서라고 해도 결단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증거를 요구하라고 해도 싫다고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직히 행하지 않았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으며,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왕하 16:2-4). 이러한 그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라고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는 자기의 어떤 계획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려는 마음에 잡혀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어떤 다른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사람에겐 두려움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는 우리 마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으면 믿음이 있을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데도, 두려움이 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물질이나 자기의 지식이나 미국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을 회개하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사람은 신앙의 결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가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징조를 선포하였습니다. 14~1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이 말씀은 가까운 날에 성취될 일과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뤄질 일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임마누엘 예언은 그 당시 역사적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진 역사적인 사실과 두 가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아이는 가까운 미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하나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이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의 백성은 사로잡혀 가서 그 땅에 버려지게 되고, 그 무렵에 이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주전 734년경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사8:3) 그리고 그 뒤 주전 732년에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하여 다메섹이 무너지고 또 주전 722년에는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무너집니다. 즉 아람과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함락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7:14절의 처녀는 처녀라는 뜻 외에 ‘젊은 여인’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와 그의 아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주시는 첫 번째 징조요 예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8:18)
하지만 궁극적인 성취는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입니다. 보십시오. 마태복음 1:21~23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물론 여기 임마누엘이라는 말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예언을 주신 것입니까? 왜 징조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까? 4절에서 하나님은 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두려운 상황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아무리 낙심이 되는 때라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시고 두려워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능력과 구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사람이 아닌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1:7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고 하십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문제가 아무리 크고, 지금 나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리 못되고 강하다 해도 능력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또 사랑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요일4: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할 때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또한 절제하는 마음으로 생활을 건전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어 기도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이 두려운 것이겠습니까? 기도하는데 미래에 희망이 없겠습니까? 주님을 모시고 경건하게 사는데 두렵겠습니까? 건전한 사람을 사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설령 비난하고 욕을 한다 해도 어떻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방주를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근신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요, 주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믿지 못하면 쓰러지고 넘어지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같이 흔들리며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과 그 백성들을 위하여 임마누엘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니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저들이 아무리 강한 것처럼 보여도, 아무리 설친다 해도 두려워마라. 저들은 연기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저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두려워 앗수르를 의지하려고도 하지 마라. 다만 나만 믿으라. 그러면 된다. 여러분 이 얼마나 확실하고 든든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앗수르를 불러들였습니다. 그 결과 유다도 믿었던 앗수르에 의해 엄청난 곤욕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의 재난을 당했고 유다는 목에까지 차는 재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당시 아하스 왕과 유다백성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진정한 징조 즉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케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아하스와는 전혀 다른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고백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현실의 문제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참혹한 현실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현실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만을 보면 낙심이 커집니다.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신뢰하고 잠잠 하라는 말씀은 집에 가서 조용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굳게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그 말씀을 지켜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굳게 선 사람은 또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건져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7장 이후에 나온 말씀대로 믿지 않는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 아래 태어나서 저주 가운데 그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는 지옥의 저주로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내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면 어찌 그들을 붙들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못하면 서지 못한다”는 말은 신학자 볼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아멘 할 수 없다.” 여러분, 그 동안 아멘을 경험해 오셨지요? 그렇다면 이런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아멘 하면 사십시다. 지금은 믿어야 할 때입니다.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