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평안(요14:25~31) | 박승남 | 2009-0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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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갈 때 여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교회에 피난해 왔습니다. 당시 교회는 서양 사람의 건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정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소라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가능한 대로 조선 정부의 법을 지키면서 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동학교도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다가 예수를 믿겠다고 황해도 소래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으려면 살인죄를 자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고였으나 그 중 한 사람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찬송을 부르며 평안을 유지하여 간수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을 가고 친일파들이 숙청되자 그는 자연히 사면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소래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16㎞를 걸어서 매주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심지어 일 때문에 30㎞ 밖에 있을 때에는 미리 토요일 밤에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주일을 온전히 지킨 다음 밤늦게 높은 산을 넘어서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1895년 늦가을 언더우드는 소래교회를 방문해서 그와 세례문답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언더우드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는 죄인인 나를 예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제게 벌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실로 평화는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재앙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고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습니다. 대적들이 그의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했으니 너무도 억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내 마음, 이렇듯 편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든든할 수 있을까요! 주께 노래 불러 드리겠습니다. 주님께 찬양을 바치겠습니다.” (현대어성경)라는 고백입니다. 누가 이렇게 고백했습니까? 다름 아니라 당시 사울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 있었던 다윗입니다. 그가 그러한 환경, 상황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노래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 불안과 초조와 어수선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감히 그 누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가 되시기 때문에, 담대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건강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하고, 또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속에 '평안'이 있어야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부유하고 신체적으로는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는 자는, 마음속에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충만한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같은 평안의 축복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속에 이미 거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당하고 있는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 발에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 행실이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이목과 시선을 받던 그 여인은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은데, '과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약간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그 여인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평안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혈루 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깨끗이 치료함을 받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불안해 떠는 자들의 마음속에 참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평안을 끼치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전도 파송하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안함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만약, 그 집이 예수님의 평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 평화가 기도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평화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 곧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 예수님이 소유하신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돈이 많아야 평안한 것 같고 힘이 있어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높아져야 평안한 것 같고 건강해야 평안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는 평안이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는 평안은 다릅니다.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고 힘이 없어도 누릴 수 있으며 낮은 지리에 있어도 누릴 수 있고 병들었어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 주님의 평안입니다.
2)세상이 주는 평안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평안입니다. 죄사함의 은총에서 누리는 평안, 영생의 삶을 바라보는 평안,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통한 평안, 이런 것을 세상이 주는 평안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3)세상이 주는 평안은 문제가 없어야 평안입니다. 문제가 없는 때가 없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자식문제 해결되면 남편 문제 생기고 남편 문제 해결되면 시부모 문제 생깁니다. 하루도 문제없는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그런 문제가 안 생겨야 평안이라 하는데 그런 평안은 죽은 다음에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는 평안은 문제를 당하면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요셉처럼 노예로 끌려가면서도 누리는 평안이고 다니엘처럼 사자굴 속에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한 차원 높은 평안인 것입니다. 4) 세상은 가진 자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부자는 그 부함 때문에 더 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이목을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함보다는 겉치레를 포장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 부자유스럽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또한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평안입니다(합3:17, 18). 5) 전쟁에 사용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수물자를 증강하지만, 더욱 전쟁의 공포와 불안은 더해가기만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은, 물질의 평안, 건강의 평안, 또는 명예와 권력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져다주는 이같은 평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눅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속에 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 주님이 누리는 그 평안, 그리고 세상 것과 다른 그 평안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성령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 보혜사에 대하여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원문으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쉽게 알려면 당시 이 말이 쓰인 역사적 배경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유달리 자녀에게 엄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곁길로 가거나 잘못을 하면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차 없이 꾸중을 합니다. 인정사정없이 채찍을 들고 체벌을 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간혹 아버지의 징계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친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래도 아버지가 날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며 좌절해 있는 자녀에게 다가 갑니다. 가서 아버지의 심정을 대변해주며 아이를 위로해줍니다. "자녀야! 아버지가 널 미워서 때린 줄 아느냐? 아니다. 널 때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찢어지도록 아픈지 모른단다. 지금 아버지는 그 아픈 마음으로 옆방에서 너보다 더 속상하여 울고 계신단다. 널 얼마나 사랑하시고 네가 얼마나 잘 되길 원하셨으면 아버지가 이렇게 때렸겠니?" 어머니의 이러한 변호와 위로에 자녀는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잘못을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평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어머니의 역할을 이스라엘에서는 '파라클레이토스', 즉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는 이런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보혜사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여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심한 징계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절망해 있을 때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변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변호, 대변 때문에 우리는 절망과 불안과 의심 속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보혜사가 와서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즉 우리가 고난과 역경에 처해질 때 주께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등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성령님의 변호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탄식과 변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더욱 강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참 평안을 누리는 행복한 삶이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은총 속에서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아가 이 평안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주고 나누어 주는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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