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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사는 비결 (요15:1~10) 박승남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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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사꾼이 온 거리를 다니며 “인생을 참답게 사는 비결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인생의 비결을 팔라고 독촉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비결을 사라고 소리치던 사람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결이 어디 있느냐고, 그것을 빨리 내놓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참답게 사는 비결을 판다고 호언하던 그 사람은 우선 사람들을 질서 있게 정돈시켰습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게으른 사람보다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보다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보다도, 책임감이 없는 사람보다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쁜 사람은 입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참답게 사는 비결은 바로 자기 자신의 혀를 조심하며 사는 것입니다." 험담을 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는 것이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험담을 하는 자신, 둘째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셋째는 그 험담의 화제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입 때문에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별로 쓰임새도 없는 물건은 잘 간수하면서도 재앙을 부르는 입을 잘 간수하지 못한다면 말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면할 수 없습니다. 눈도 둘이고 귀도 둘이면서 입은 하나인 까닭은 눈으로 자세히 보고, 귀로는 많이 듣지만, 그 대신 말은 적게 하라는 의미일 텐데요. 말을 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생각하라는 말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고별설교입니다. 그래서 15장에 들어와서도 주님의 고별 설교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15장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주님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비결, 즉 성도가 살아가는 비결을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하면서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관계란 가까웠다 멀어졌다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물론이거니와 부부도 어느 순간에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와 가지는 한 순간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떨어지는 순간이 곧 가지에게는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보다도, 부부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한순간도 우리와 떨어질 수 없듯이, 주님과의 관계도 한 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인간관계는 적당히 떨어질 줄도 알아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주님과는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니, 혹 너무 숨 막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붙어 있을 수 있을까요?

 

주님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로마서 1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습니다. 뿌리를 보아서는 도저히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고 구원은 상상할 수도 없는 돌 감람나무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때 우리는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 붙어사는 포도나무 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가지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나무가 공급해 주는 진액을 받을 때 매일 매일 24시간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 정원에도 포도나무가 심겨졌고 작년에 작지만 그 열매를 먹어보았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는 훨씬 많이 달릴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무화과나무와 함께 흔한 식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사람들이 아주 쉽고 단순하게 교훈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송이는 젓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을 묘사하고 풍성함을 상징하며, 언제나 최고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오늘 말씀을 분석해 보면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매라는 단어가 2절에 3번 그리고 4절, 5절, 8절에 각 1번씩 모두 6번 나옵니다. 그리고 안에 라는 단어가 9번 나옵니다. 4절 2절 두 번, 5절에 2번, 6절에 한 번, 7절에 2번, 그리고 9절과 10절에 각 한 번씩입니다. 그와 함께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거한다는 단어로 4절에서 10절까지에서 9번이나 나옵니다. 결국 이 단어만 정리해도 안에 거하라 그러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됩니다. 포도나무에서는 주렁주렁 포도송이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가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말씀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멀리하면 곧 주님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동해안에 살고 있는 어부들은 바닷속 중요지점에 어초(魚草)를 만들어 둡니다. 어초란 고기 '어'에 풀 '초', 즉 물고기를 위한 초가집이란 뜻입니다. 크기는 일정치 않지만 대게 가로 세로 높이 5m정도의 콘크리트 층층집을 짓고 그 위를 짚으로 덮고 엮은 뒤, 그것을 바다 속의 중요지점에다 설치해 둡니다. 그러면 산란기가 된 물고기가 바로 그 곳에 알을 낳고, 시간이 지나 부화된 물고기는 그 어초 인근해역에서 계속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부가 바다 속에 어초를 짓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획고를 올려주는 첩경입니다. 다시 말해 어초야말로 어부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어부답게 굳건히 지탱케 해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확고한 보증서가 되는 것입니다. 어초가 많을수록 어획고는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는 어초를 만드는데 투여되는 시간과 노력을 조금도 귀찮아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동해안 어부에게 고기 '魚', 어초가 필요하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산란할 수 있는 말씀 '言', 언초(言草)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내 마음 속에 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과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언초가 자리 잡는 것으로부터, 바로 우리의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지침에 따라 비로소 바르게 세워지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삶이 타인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인생의 지침을 주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세우시는 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었노라 기쁨으로 보고 드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마음속에 영원한 지침, 하나님 말씀을 위한 언초를 세우십시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어야 라디오 소리가 잘 들리듯, 영적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면 하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립니다.

둘째, 비밀 번호도, 주파수도 맞는데 들리지 않는 이유는 접속이 불량하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맺어졌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숨은 죄가 있거나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기심, 욕망, 야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충고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못합니다.

셋째,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불순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하거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고, 사람을 이용하면 금식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넷째, 성경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관한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삶의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지금 몇 시입니까?" 하고 물으면 "지금 9시 40분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봐라" 하는 식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묻는 질문의 해답 대부분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십계명부터, 직업 선택의 원칙, 사람 사귀는 원칙, 상처받았을 때 해결하는 방법 등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음성을 들려 달라고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면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됩니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교만이 자리 잡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거짓되고 순종하지 않게 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여섯째,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정해 놓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이기심은 다 숨기고 겉으로 교양 있는 척, 신앙이 좋은 척합니다. 이기심도 만족시키고 신앙적 칭찬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불순종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일곱째, 자기 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적이 누군지 압니까? 그것은 사탄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내가 조용히 해야 상대방 말소리를 들을 수 있듯, 내 생각을 죽이고 내 자존심과 의지를 꺾은 뒤, "주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며 주님께 의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듣는 음성은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이서 7절을 보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은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나무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나무 가지 속에서는 수 없는 수액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끊임없이 오고 갑니다. 그러면서 나무와 가지가 생명을 나누며 자라가는 것이, 마치 내 안에서 피가 쉴 사이 없이 돌아감으로 우리 생명이 유지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란 뜻입니다. 내가 주님께 무언가를 보내고,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관계, 주님과 나와의 사이에 뭔가 계속적인 순환(circulation)이 지속되는 관계를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나는 주님 안에 사는 것이고, 주님 안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피의 순환이 멈춘 것을 죽음이라고 하듯이 주님과의 기도 순환이 멈추면, 곧 그건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런 가지는 언젠가는 나무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결국 농부는 그런 가지를 잘라낼 겁니다. 나무와 가지 사이에 순환이 활발하게 되면서 가지는 자라고 결국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지요.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열매는 나무의 영광이요, 농부에게는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 주님의 기쁨이요 자랑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그 말씀 안에 살면서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우리 영적 생명은 자라고 결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 하나는 하나의 교회와 비슷합니다. 포도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땅에서 솟아난 나무 밑동이 있고, 거기에서부터 가지들이 한두 개 뻗어가다 끝에 가면 수 없이 많은 가지들이 뻗어납니다. 긴 가지도 있고, 짧은 가지도 있고, 땅에 축 처진 가지도 있고, 하늘로 치솟은 가지도 있습니다. 겉으로 나온 가지도 있고, 안으로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가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 모두의 생명은 한 나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공급해 주는 영양분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교회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영양분으로 삽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듯이 교회도 열매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 열매는 송이로 따지지 포도 알로 따지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좋지 않은데 몇 개의 포도 알이 좋다고 그 포도송이를 좋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포도를 고를 때 엉성한 포도송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포도송이가 고르게 꽉 차 있는 포도송이를 선택합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한 사람이 잘 났다고 그 공동체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건강하고 골고루 성장해야 그 공동체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하고 돌봐주고 위해 기도해 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나무 가지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도와서 마침내 꽃을 피우고 탐스런 포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도들이 서로 도울 때 마침내 아름다운 신앙의 꽃을 피우고 주님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갈5:22~23)를 맺고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는 빛의 열매(엡5:9)를 맺고 선한 열매(약3:17)와 의의 열매(약3:28)를 맺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포도밭 곁을 지나면 무슨 냄새가 나나요? 당연히 포도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의 옆을 지나가면 무슨 냄새가 나야 합니까? 크리스천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포도냄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냄새, 사랑의 향기를 널리 널리 풍길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3단어는(제거되어) 버려지고”, “말라지고”“사르느니라”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말씀과 기도의 순환이 멈춘 가지를 처리하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으로 로마서 8장 30,33절에 나오는 <택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 그리고 시65편 4절의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과는 정 반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가지가 되시겠습니까? “버려지고”, “말라지고” “살라지는” 가지입니까? 아니면 주님 안에, 주님의 뜰에 살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영화롭게 되는 가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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