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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친구 (요15:10~17) 박승남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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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와서 참으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마음 든든하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는데, 친구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친구가 없는 사람은 참으로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고귀한 친구조차 갖지 못한 사람은 사는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헬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친구의 소중함을 극대화해서 말한 줄 압니다. 물론 무조건 친구가 있어야만 인생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친구가 없다고 해도 가치 있는 삶을 사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구가 있으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 있는 중에 더욱 더 가치 있는 삶을 사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도 친구를 얻지만, 우리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는 중에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 함석헌 선생님의 시 가운데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너 뿐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리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 "너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오"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고 /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현대는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는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신세대들의 경우, 극단적인 개인주의(personal)와 자기 사랑(self-loving)에 빠져 자기 외의 모든 사람들이 주변 인물로 그려지고 심지어 자신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이런 풍조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말 살벌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와 직장에서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경쟁력으로 등장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원들이 경쟁이 아니라 친구관계가 되어야만 조직이 성공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직장에서 아주 가까운 친구가 세 명 정도 있는 사람은 일에 충실할 확률이 96퍼센트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직장에 가까운 친구가 없으면 일에 충실할 가능성은 12분의 1라고 하였습니다. 직장 내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경쟁력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기업 내에는 친구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기업의 상사들은 아랫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친해지면 지시를 무시하게 되고 권위가 상실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직장 내에 절친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회사생활이 재미있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고객들에게 충실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냅니다. 사고가 적고 안전한 직장 생활을 합니다. 절친한 친구를 가진 사람이 생산성이 높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2002년 11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친구, 가장 좋은 보약:건실한 우정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좋은 친구관계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40% 낮고 또, 감기에 걸릴 확률도 네 배나 줄어들고 심장병에 걸릴 확률도 3배나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러한 실험결과들을 통해서 보면 친구관계가 좋고 사회활동이 좋은 사람들은 치명적인 병을 이길 수 있고, 더욱 강한 면역체계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삽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진정한 친구를 가리켜 ‘아킵’(akib)이라 불렀습니다. ‘아킵’이란 말은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친구와 행운이란 말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행운도 친구도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친구는 항상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친한 친구를 가진 사람은 가슴이 비지 않고 차있는 사람입니다.

 

잠언 18:24에는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입니다. 삼상18:1절에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후일에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데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라고 애가를 불렀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많은 벗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벗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는 그 수가 많음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친구지만, 영원하고 진실한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친구가 없이 사시는 분들을 보는데, 너무 개성이 뚜렷하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려면 이타적인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을 좋아해야만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언제나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고독을 즐기는 사람,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번거로운 것으로 생각하면 친구를 사귀지 못합니다. 친밀하고 사교성이 있어야 하고, 어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서 일생 마음 든든하게,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고 위급한 때 서로 도와주며,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나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다는 분이 있습니까? 사실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곁을 떠나고, 자기의 사업으로 인하여 멀어지지만,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세상에 없는 사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분인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사람입니다. '벗'이라는 말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는 의미의 '친구'라는 말은 한문에서 온 말이지만, '벗'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서로 허물없이 사귀는 친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1:8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2:23에서도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이 낳은 유명한 내촌감삼(內村鑑三)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친구다. 그에게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가 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이 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와의 대화는 가장 즐겁다. 그를 의지함이 가장 안전하다.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다, 사실이다. 제왕이 아니다, 친구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 불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그의 지도 원조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친구간의 사랑이 쉬운 일로 보이지만, 사실 어려운 것이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친구 간에 묘한 갈등의 기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친구 간에 오히려 경쟁하고, 시기하고, 배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친구로서의 사랑보다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고, 불쌍히 여기는 동정하는 사랑이 쉽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참된 친구로서 사랑하십니다. 친구가 되시기 위하여 사람을 입으시고, 정신과 몸을 합한 목숨을 버리시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대화의 상대자가 되시고, 우리의 온갖 어려움을 도맡아 책임져주시는 큰 사랑을 주시고 있습니다.

목숨이라는 단어 헬라어의 '푸시케'라는 말은 육신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과 정신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어쩌다가 한번 인심 쓰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자신을 버리면서 친구를 살리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부부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일 때 가장 좋은 관계라고 합니다. 친구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친구라고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친구로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시면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칠 것이며, 생산적이며 풍요롭게 살 것입니다.

찬송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여러분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친구가 아니고, 그렇게 안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생활이 순조롭고, 잘 나가는 때에는 친구들이 붙어 있지만, 생활이 어려워지고, 자기에게 짐이 될 것 같으면 다 숨어 버리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형편이 좋을 때에, 돈 좀 쓰고 다니면 함께 있어 주는 친구는 사실 친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친구라고 하면 나의 약점을 따끔하게 책망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는데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그늘에서 훈계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친척은 선택할 수 없으나 친구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흉금을 털어놓고, 꿈과 희망, 두려움과 불안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란 다른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갈 때 내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말하는 것처럼 "친구란 그의 어깨에 나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사람"입니다 . 세계 많은 명언들이나 인생을 교훈하는 책에서 친구에 관하여 말한 것을 보면 먼저 내가 친구가 되어주어야 친구를 사귄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나누고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 때에 상대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먼저 희생하시고, 먼저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시고 친구로 다가오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오직 두 곳에만 '친구'라는 말이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불신 세계에서 예수님을 평가하는 말 중에 '친구'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7: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은 그가 와서 빵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니까 기이한 사람, 미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의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와 창기 같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함께 다니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마태라는 사람은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묵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말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까지 흉허물 없이 다 말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온갖 비밀을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길이시었고, 진리시며 생명이시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사랑은 즉 [필리아]는 단지 동등한 사람들만을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유인은 결코 노예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욱 사람이 신(神)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정'이란 단지 동등한 사람들의 폐쇄된 영역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지만 유유상종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재도 상류사회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사람으로 나뉘고, 사귀는 사람도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친구의 정을 나누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뎌 여러분 14절 말씀을 보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친구라고 하신 것은 아니고,“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명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17절“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하려 함이라” 또한 12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면 너희도 사랑을 해야 한다. 너희도 나처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로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밖으로 넘쳐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우리들의 사랑이 포도나무를 감돌 때, 포도나무 전체가 사랑으로 뒤덮이는 모습, 이것이 주님을 믿는 공동체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그림입니다.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을 말합니다. (Love is giving.)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았고 독생자를 주시면서 사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았고 자기의 살과 피와 생명을 모두 쏟아 부어 주시면서 사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고 기름과 포도주와 짐승과 치료비를 주면서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을 실천하고 또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친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별로 가치도 없고 인간적으로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2. 사랑한다는 것은 되는 것을 말합니다. (Love is becoming.)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되는 것은 주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라고 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나환자들을 너무 사랑하다가 자신이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스티브 린튼과 존 린튼 형제는 한국을 너무 사랑하다가 한국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한국 여자들과 결혼을 했고 한국말을 한국 사람들보다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편처럼 되는 것을 말하고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처럼 되는 것을 말하고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녀처럼 되는 것을 말하고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3.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Love is dwelling.)  참된 사랑은 주는 데 그리고 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거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영혼 구원을 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순천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며 살았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죽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비롯한 118명의 선교사들의 시신과 205명의 외국인들의 시신이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언더우드 3세는 지금도 한국에서 한국말을 한국 사람들보다도 유창하게 말하며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받을 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더욱 기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친구 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함으로, 다른 이에게 참된 친구가 되어 줌으로 더욱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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