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가슴을 채워주시는 하나님(룻2:1~13) | 박승남 | 2013-07-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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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1~13 텅 빈 가슴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살기 위해 모압으로 갔다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가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는 가슴이 텅 비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압에 가서 남편도 잃고 두 아들마저 먼저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며느리 청상과부뿐입니다. 나오미는 통장도 텅 비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세상에 내쳐졌습니다. 나오미 뿐만 아니라 룻도 텅 비었습니다. 가슴도 텅 비었고 머리도 텅 비었고 통장도 텅 비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세상으로 온 것입니다.
룻기 바로 앞에 사사기가 나오는데 사시기 19장의 이야기를 보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어떤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에선지 그녀가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첩을 데려 오려고 베들레헴 장인 댁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며칠을 머물다가 장인이 쉬었다 아침에 가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해가 기울었는데 장인 댁을 떠납니다. 베들레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넘어 기브아까지 가서 어느 노인의 집에 머뭅니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고 베냐민 지파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밤에 그 마을의 불량배들이 그 여인을 끌어내어 밤새껏 욕보여 죽였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유대여자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민족입니다. 남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에게 빼앗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책이 룻기입니다. 사사기 다음 룻기가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험한 세상에 룻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있는데도 빼앗아 욕보였는데 남편도 없는 그것도 모압 여자인 룻이 온전할 것 같습니까? 2:1절을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유력한 자가 친족으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 유력자란 - 용사란 말입니다. 굉장히 힘이 있는 용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보내 주신 용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뭔가 희망을 풍깁니다. 좋은 징조 같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절을 알지만 나오미도 모르고, 룻도 모릅니다. 그냥 형편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 룻은 끼니 때울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룻이 밭에 이삭을 주우러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것이 없어서 이삭을 주우러 가야 한다면 누가 가야 할까요? 여러분 베들레헴은 나오미의 고향입니다. 거기 자기 친척도 있고 얼굴 익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밭에 나가야 할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더구나 룻은 베들레헴의 지리 동서남북도 알지 못하고 천대받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이 때 룻의 나이 몇 살쯤 되었을까요? 성경은 말하지 않지요. 그런데 보통 그 당시 14세쯤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고 시간이 걸렸다 해도 아직 20살이 못 되는 때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어린양이나 하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 모압 여자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하니까 나오미는 “내 딸아 갈지어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시어머니입니까? 말이라도 “내가 갈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보니까 우리 이명순 권사님도 밭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면 나오미는 어떤 형편일까요? 기동도 못하고 일할 수 없는 나이인가요? 아닙니다. 그녀는 얼마 전 모압에서 베들레헴까지 걸어온 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곤을 하겠지만 자기 고향 자기 백성인데 자기가 안 나가고 이방여자인 며느리를 보내는 심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던지 아니면 뭔가 믿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룻입니다. 룻은 그야말로 불행할 줄 알고 온 여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그래도 모압보다는 이스라엘이 나으니까 왔겠지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선택했을 것이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베들레헴에 먹고 살 것이 없으니 모압 땅으로 갔잖아요. 그러니 사실 모압 땅이 훨씬 더 비옥하고 먹을 것도 풍족합니다. 그런데 왜 룻은 베들레헴으로 온 것일까요? 이런 것을 가리켜 불행으로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돌아갈 기회가 없어서요? 아니면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서요? 왜 베들레헴을 선택했나요? 그런데 룻이 베들레헴을 선택한 이유를 알려면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떠날 때 모습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분명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도 아무 희망도 없는데 따라간다고 한 것입니다. 1:15절을 보면 나오미가 말합니다.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여러분 룻의 동서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브라입니다. 조금 곁길로 나가는 일이지면 오브라를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오프라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아주 잘 나가는 여성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모압으로 돌아간 오브라가 미국에 살아왔나요? 오프라 윈프리는 모압으로 돌아간 오브라와는 같은 이름이지만 신앙이 전혀 다릅니다. 오브라는 어렸을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불행을 겪었습니다. 사생아로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열세 살에 성폭행을 당하고, 열네 살에 임신을 했으며, 스무 살 때에 마약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실패와 고난을 극복한 흑인 여성들의 삶을 다룬 소설을 읽으며 그러한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녀는 항상 감사를 잊지 않고 다름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경청과 공감을 통해 치유의 사역을 하고 성범죄 예방에 힘을 쏟으며 사회적 공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일하는 것입니다. 오프라는 토크쇼에서 여러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여 미국에서 독서 붐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녀가 4일(현지시간) 부터 새로운 `북 클럽'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이 북 클럽이 처음으로 선정한 도서는 26세 젊은 여성인 체릴 스트레이드가 절망 속에서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주에 이르는 4천릿길을 혼자 하이킹에 나서 삶을 추스른 내용을 담은 책 `와일드(Wild)'입니다. 작가 서머셋 모음은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몽테스키외는 "나는 한 시간의 독서로 누그러들지 않는 어떤 슬픔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어야 할 가장 귀한 책은 바로 성경인줄 믿습니다. 지난주일 광고 드린 대로 지난 주 김천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결과보고 및 북한 사역 선교사 초청 특강이 있었습니다. 이 때 김선교사님은 “성경은 개인은 물론 한 국가까지도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책이고 북한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을 등한시 하는 교인, 업신여기는 교인, 반대하는 국가, 잘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이 책을 얼마나 중요시 하느냐에 따라 교회 성장의 열쇠가 있습니다. 북한선교도 여기에서 출발해서 여기에서 끝나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참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진정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여 힘써 읽고 묵상하고 듣기를 좋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오브라는 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나요? 1장 15절을 자세히 살려 보십시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그 그렇습니다. 이것을 보면 오브라는 신앙 때문에 자기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포기할 수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룻이 시어머니 따라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효도하기 위해요? 글쎄요~ 아직까지 거기까지는 못 미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1:16절을 보십시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오브라가 자기들의 신을 향해 갔다면 룻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새 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걸 나오미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 보니 “아, 우리 며느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가 모압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도, 전도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믿으라고 권한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나오미는 나오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뭔가 다른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룻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게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아, 당신 같으면 내가 하나님 믿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말은 너무 풍성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당신들 사는 것 보니까 하나님 안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냐, 그게 하나님 믿는 것이냐?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안 믿겠다”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꾸로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우리가 우리 입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 전도세미나를 통해서 전도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많은 분들이 결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신은 안했을지라도 우리에게 전도가 그리고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나오미처럼 삶을 전도하는 것도 또한 중요합니다. 아, 당신을 보니 내가 예수를 믿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일까요? 여러분 이방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사람 바라본 것도, 사람에게 기대한 것도, 물질 바라보고 온 것도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바라보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 룻은 왜 이삭을 주우러 갔나요? 여러분 베들레헴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베들레헴하면 뭔가 풍성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베들레헴 서쪽은 깊은 낭떠러지입니다. 800m에서 300m로 떨어지는 골짜기입니다. 거기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쪽에 밭이 조금 있습니다. 거기서 이삭을 주우면 얼마나 주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나가는가요. 2:2절을 보면 룻이 밭에 나갈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여러분 왜 룻이 나갑니까? 누군가 자신에게 은혜를 입혀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나간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땅이 누구의 땅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동서남북 구분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은혜를 기다리고 갑니다.” 이게 룻입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들에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세월 동안 그리고 지난 6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사셨습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그 무엇입니까? 진정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줄 믿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가보니까 그게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3절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연히 가보니 보아스의 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이 준비한 우연이지 결코 그냥 우연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준비해 놓은 우연 말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의 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4절을 보면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어의 뜻은 보라!, 자~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기 봐, 보아스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온다.”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연하게 룻이 보아스 밭에 이르러서 이삭을 줍고 있었는데 보아스가 오고 있으니 보아스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는 보아스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라! 라는 뜻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룻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발길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잠언16: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밭에 도착한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낮 모르는 룻을 보았을 때 사환에게 물어 봅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이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저 여자가 누구 거냐?” 그러니까 “임자 있어?”라고 묻는 야한 질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얼마나 험악한 시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경건한 보아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설명하자 보아스의 말이 달라집니다. 8절입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내가 네 이야기 들었다. 네가 시모에게 베푼 은혜로운 이야기 내가 다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피하기 위해 이 땅에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다. (네가 그렇게도 갸륵하게 행하였는데, 어찌 야훼께서 갚아 주시지 않겠느냐?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날개 아래로 안식처를 찾아 왔으니, 너에게 넉넉하게 갚아 주실 것이다." 공동번역) 여러분 이 얼마나 고맙고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진정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의 축복이 그동안 낮선 땅에 와서 고생하는 룻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로써 그녀의 텅 빈 가슴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위로를 나누고 있습니까? 얼마나 축복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텅 빈 가슴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보아스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은혜스러운 조치를 합니다. “어디 가지 말고 내 밭에서 온 종일 이삭을 주어라. 일하는 사람에게는 이 여자 건들지 말고 이삭을 더 줍도록 남겨주어라. 그래서 결국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이 말은 나오미와 룻이 먹고 사는 것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먹고 살기에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룻이 집으로 돌아올 때 보아스가 겉옷에 곡식을 가득 담아 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곡식으로 채워진 것만이 아니라 그의 텅 빈 가슴이 가득하게 채워진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입니다.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보아스가 가득 채워준 것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풍성하게 안겨준 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룻은 텅 빈 가슴으로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빈 손이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4장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게 됩니다. 나오미 가슴에 자식까지 안겨준 것입니다. 텅 빈 가슴이 아기로 채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모든 것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건 나오미의 가슴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룻의 텅 빈 가슴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이에게서 다윗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잖아요. 여러분 룻의 후손 중에 누가 있습니까? 네, 바로 다윗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진정 그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텅 빈 인생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텅 빈 가슴으로 이 자리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성령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사명으로 채워주십니다.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베들레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전까지는 그야말로 이름 없는 마을, 아무도 모르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베들레헴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면 누구 때문일까요? 예수님 때문에요, 아니면 다윗 때문에요? 아니, 바로 룻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산 룻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다윗이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다 버려진 땅을 룻 한 여인이 온 세계 사람들이 흠모하는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재작년에 이스라엘 학습여행 때 주일 날 사해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해는 소듬과 고모라가 있던 곳입니다. 그날 이연길목사님께서 창세기 13장으로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벧엘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질 때 롯은 동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양을 치면서 아마 소돔에 왔다 갔다 한 것 같습니다. 돈 많고 화려하고 놀기 좋은 곳 말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를 맘에 두고 있다가 동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요? 아브라함은 동쪽이나 서쪽이나 그 어느 쪽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땅에 매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 가서 살면 잘 살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땅은 별거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재산과 향락과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뭡니까? 롯의 선택은 사해가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저주 받아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빈손이 되었습니다. 나오미 가족도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모압 땅을 택하여 갔을 때 비록 풍족하게 나갔어도 빈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택하고 돌아왔을 때 텅 빈 가슴이 채워졌습니다. 빈손도 가득 채워졌습니다. 아브라함도 살기 어려운 땅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그는 온 세상에 추앙받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미국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몰라주고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났는데 내 이름을 사람들이 알아주건 못 알아주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룻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좋은 땅도 없고 나쁜 땅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땅은 저주 받은 땅이 될 수도 복 받은 땅에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아름다운교회는 베들레헴, 여러분의 가정도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이름 없는 촌스러운 베들레헴으로 만들 수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베들레헴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몫입니다. 우리가 하는 대로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은혜 주실 것입니다.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풍족한 사람도 하나님을 떠나면 빈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 손, 텅 빈 가슴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아가면 가득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기도하겠습니다. 2013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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