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이 좋은 편을 택한 사람(눅10:38~42) 박승남 2013-07-26
  • 추천 0
  • 댓글 0
  • 조회 514

http://gsnn.onmam.com/bbs/bbsView/34/442190

눅10:38~42 이 좋은 편을 택한 사람

 

중국 춘추 전국시대에 살았고 이기주의인 자애설 또는 위아설을 주장한 양주라는 사람이 어느 날 마을 한 복판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우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내가 마음을 잘못 먹거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또 박애주의인 겸애설을 주장한 묵자라는 사람이 어느 날 흰 실을 손에 들고 서글퍼 했습니다. 그 까닭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실은 어떤 색깔로도 물들일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염색을 잘못하면 원래의 색깔로 되 돌이킬 수가 없지 않느냐?"

둘 다 사람은 처신을 잘해야 하고 선택과 출발을 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맥추감사주일에 살펴 본 룻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방여인이었지만 자기들이 섬기던 신과 자기 민족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면서“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룻은 오늘까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름답게 기억되는 아름다운 여인,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되는데 그 모든 결정과 결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들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와 함께 기꺼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주님이 오시자마자 음식 준비를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여튼 주님이 오시자마자 이들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아도 언니 마르다를 도와 음식을 열심히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마리아는 음식 장만하던 손을 빼고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다는 표현은 ‘배우는 제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처럼 철저하게 배우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반면 마르다는 계속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녀였기에 처음에는 그 누구보다 보다 주님을 잘 대접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것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분주해지고 그러다보니까 짜증이 났습니다. 더구나 언제부터인지 동생 마리아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까 예수님 발아래 턱하니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바빠 죽겠는데 그래 팔자 편하게 앉아있는 것입니다. 물론 몇 번은 그 옆을 지나다니면서 마리아에게 눈치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응이 없자 돌연 속상해 지고 화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마르다는 어느 때부터인가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그 마음, 기쁨으로 대접하고자 했던 그 첫 마음이 식어지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처음의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자원해서 대접하고 봉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떤 때는 나 자신의 문제 또 어떤 때는 환경과, 분위기 탓으로 기쁜 마음이 사라지고 억지의 마음이 듭니다.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뒤로 물러설 때가 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타성에 젖어들기도 하고 처음에는 주님을 위하여 하려는 봉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위한 일처럼 되어버리고도 하고, 무의미한 일처럼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처음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처음에 내가 어떠한 마음으로 하려고 했는가?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첫 사랑, 처음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순순한 마음, 기쁨으로 시작한 마음, 처음 사랑, 열심 말입니다. 환경이나 주변만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잘 모시고 싶은 그 마음을 계속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욕을 해주고 싶고 마리아를 나무라고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차마 예수님 앞에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의 딸처럼 화를 내지 않고 예의를 갖추어서 예수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결론은 자기 동생을 부엌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를 부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름을 두 번 부른 것은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말입니다. 주님은 마르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던 마르다의 마음, 정성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르다가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만 마르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바쁜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배운다고 하는데 그 얌체 같은 모습에 속상해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마르다의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답게 타이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때문에 걱정하는구나. 하지만 반찬은 몇 가지면 된다. 아니면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 마리아는 참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마르다도 칭찬한 셈이고, 마리아도 칭찬한 셈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마리아가 그 후에 부엌에 들어가 언니를 도와주었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주님 발 앞에 앉아 계속해서 배웠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얌체처럼 말씀만 배우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마리아가 더 훌륭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반찬 그릇이 몇 개냐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라는 겁니다. 초점은 분주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기 저기 끌려 다닌다’ 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걱정과 계속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과 외모가 일그러져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초점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과중한 짐을 지다’ 라는 뜻으로 ‘매우 지쳐 있고 과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마르다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무리하고 지쳤으니 당연히 인상을 쓰고 다녔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것은 뭘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지금 누구를 위해서 마리아가 분주한 것입니까? 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마르다의 중심은 주님이 아니라 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일 때문에 예수님은 건성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를 읽어버렸고 얼굴이 일그러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어떠한 일이나 그 일을 성취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신앙에서 가장 큰 위험은 말씀 없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점입니다. 말씀 없이 많은 일을 하려다가 마침내 얼굴에 인상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에 은혜 받지 못하고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결국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일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후에는 주님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나 사회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정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오셔서 거니시며 말씀하시기도 하는 정원입니다. 주님은 잘 정돈된 마음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교제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마르다의 마음의 정원은 어지럽혀질 대로 어지럽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중심을 바로잡으라고 사랑으로 충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거니실 만합니까? 혹시 세상 근심 걱정 때문에,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졌기에, 아니면 세상의 정욕과 유혹 때문에 어지럽혀진 마음은 아닙니까?

 

어쩌면 마리아는 좀 얌체 같은 여인입니다. 부엌에서는 바빠서 야단인데 자기는 몰라라 하고 주님 앞에서 말씀만 배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한 가지 아름다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왜 우리 집에 오셨는가 하는 점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집에 오신다면 왜 오실까요?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왜 오실까요? 대접받으시려 오실까요?

물론 당시 주님은 육신을 입고 계셨기에 음식을 드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음식을 탐하시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또 주님이 오셨다 것은 그분의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주님의 그 마음, 그리고 그 기회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제쳐놓고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는 마리아의 얌체 같은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실로 마리아는 그 어떤 것보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애쓰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분의 목소리에 경청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에 평안과 행복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선택했다”

이 말씀은 행함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십니다. 부모는 연세가 들면 자녀들이 뭘 사다 주고 어쩌다 잘 대접해 주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함께 더욱 좋아하시는 것은 함께 살아주는 것,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하려고 하면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일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려야 할 중요한 기도 중에 하나가 일꾼을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 가지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나가서 일하고, 말씀을 배우고 또 나가서 일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른 것을 다 못해도 이 일만은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의 비결이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그 말씀을 듣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원문인 헬라어로는 “ARKE에 LOGOS가 있었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ARKE”란 단어는 맨 시작인 태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초란 의미도 됩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은 "기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우리들의 삶의 기초에 하나님이 계시고 삶의 바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될 때에 크리스천들의 삶이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배우는 일로 주님과의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잘들은 마리아가 나중에 어떠한 일을 하게 되었나요?

성경에는 그녀의 이야기가 세 번 나오는데, 세 번 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주님의 발 앞 아래 엎드려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이 그렇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녀는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장면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후에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가 베다니에 들르셨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앉아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귀한 것을 아낌없이 부어드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발을 닦이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생(영원한 삶)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즉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깊이 관계(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친근하고 가까워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이전에 소개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10:30-37)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해 답한 계명인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10:27; 비교. 신 6:5; 레 19:18)는 이 말씀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이웃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계명의 전자에 해당하는 ‘하나님 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듣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 일은 바로 말씀을 듣는데서 비롯됩니다. 이를 통해 주님과 날마다 더욱 좋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잘해야 하지만 동시에 목회자와의 관계, 성도와의 관계 가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신자와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복음이 건너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잘 맺지 못해 복음이 건너가는 다리가 부실하면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씩 관계를 잘 맺어 가면 어느 순간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잘 들어 주어야 하고 또한 쉽게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자기 입장으로만 생각하니 마리아가 야속하고 얄밉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랑하는 예수님마저 자기를 생각해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 들어 입에서 불평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제대로 아십니까? 같이 살아가는 가족, 같이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제대로 아십니까? 혹시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여 쉽게 정죄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없나요? 일그러진 마음, 찡그린 얼굴로 대하는 것은 없나요?

 

여러분 세상적인 고민과 갈등이 찾아올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도 우리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주님께 나아가 그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 그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한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시편 73: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일은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말씀을 듣기 위해 겸손히 마음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잃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중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여러분의 중심에 기초가 되도록 하십시오. 이를 위해 주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말씀이 흐르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믿음은 성장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음으로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있고 나아가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므로 이해하는 마음, 포옹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영적 재충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고 배우는 것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이것이 주님을 잘 대접하는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한 마리아는 주님을 가장 잘 대접한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안 여인, 그래서 주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알고 대접했던 여인! 주님을 위한 봉사는 어떤 형식이 아닙니다. 주님을 잘 알기에 그 마음으로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알고 섬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헛된 일에 분주한 것은 아닐까요?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섬기는 일이 얼마만큼 주님을 위한 일이며, 얼마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과연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 일에 바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떤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013년 7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신8:11~19) 박승남 2013.08.18 0 508
다음글 텅 빈 가슴을 채워주시는 하나님(룻2:1~13) 박승남 2013.07.24 0 1016